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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직업 차별은 시대착오…좋아하는 일 하는 분위기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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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세계 10위 경제에 걸맞는 직업관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 주임교수·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 주임교수·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직업에 귀천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직업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차별을 하는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2017년 국내 한 취업 포털업체가 성인 남녀 223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52.1%가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응답을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이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가치관에 의해 선비인 사(士), 요즘으로 치면 정·관계 인사는 귀하게 여겨 우대하고 農(농부)-工(장인)-商(상인)의 순으로 존비(尊卑)가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사농공상의 유래는 어디서 왔을까? 이는 중국 춘추(春秋)시대 관중(管仲)이 저술한 『관자(管子)』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사농공상 네 백성은 나라의 초석”(士農工商 四民 國之礎)이라 하여, 백성을 네 부문으로 분류한 것이지 차별을 두지는 않았다. 아울러 네 부문을 각기 특성을 갖는 단위로 분류해 공간적으로 떨어져 살게 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농·공·상 간 차별의식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이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점차 발달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진전된 결과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제는 기술 없이 개인 장래는 물론 국가 경제의 미래도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고 성공한 장인이나 상인을 부러워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다. 물론 대학입시에서 아직도 의대를 선호하는 현상을 보면 디지털 혁명의 흐름에 상응할 정도로 과학이나 기술이 확실하게 우대받는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국민 과반이 여전히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겨
정부 주도 경제 개발의 잔재 아직도 남아 있어
어떤 직업이든 충분히 존중받는 풍토 만들어야
국민 행복지수 높아지고 국가 발전 동력 강해져

블루칼라 직종 뛰어드는 청년 늘어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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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士)는 어떤가? 안타깝게도 여전히 우대받는 분위기다. 2022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청년층 취업준비생 10명 중 3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현실이다. 그만큼 사(士)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얘기다. 각종 행사에서도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우대받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곤 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시장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정부가 시장의 역할을 하면서 경제 개발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틀에 맞추어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주역은 정부 즉, 사(士)였다.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 세계 10대 무역국이 되었다. 그런 만큼 이제는 정부의 역할도 시장의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쪽으로 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더불어 사(士)를 포함한 농·공·상 전 분야가 각자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실천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해 말 한 언론은 명문대 출신 청년이 도배공으로, 그리고 20대가 버스 기사·건설소장·해녀 등으로 활약하는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학력이나 성별을 불문하고 사무직이 아닌 블루칼라 직종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청년들이 느는 추세라는 것이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 1월 발표한 초·중·고 학생의 장래 희망 직업 조사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초등학생의 경우는 운동선수·의사·교사·크리에이터·경찰관·요리사·프로게이머·배우·가수·법률전문가 순이었다. 중학생의 경우는 교사·의사·경찰관·운동선수·군인·공무원·요리사·소프트웨어 개발자·뷰티 디자이너·경영자 순이었다. 고등학생의 경우는 교사·간호사·군인·소프트웨어 개발자·경찰관·공무원·의사·생명과학자·경영자·의료보건 관련 직업 순서로 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온라인 기반 산업 발달에 따라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희망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특히 이 조사에서 학생들이 희망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답변한 사실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게 한다.

기업인 의욕 북돋는 분위기 절실

최근 변화하는 청소년들의 경향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직업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당당하게 임하는 추세다.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의 견해를 빌린다면 이들 청소년의 행동 양식이야말로 ‘소유’를 넘어 ‘존재’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롬은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란 사용할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어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할 목적으로 일한다면 그 끝은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존재적 인간’은 더 높은 완성을 위해 살기 때문에 소유에만 집착하지 않고 매사에 당당할 수 있다고 한다. 지적 창조력이나 이성·사랑과 같은 존재적 가치는 실행하면 할수록 증대된다는 것이 프롬의 시각이다.

이제는 ‘사농공상’이라는 말을 직업상의 계층 구분이 아닌 ‘역할’을 구별하는 용어로 사용하면 좋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2500년 전 출간된 『논어(論語)』를 되새김해본다. ‘안연편(顔淵篇)’에서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공자에게 ‘정치’를 묻는다(齊景公 問政 於孔子). 이에 대한 공자의 답은 간단명료하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그건 바로 기업은 기업대로,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충분히 인정받고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특히 기업인의 의욕을 북돋워 주는 분위기는 매우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임하면서 직업과 무관하게 서로 존중할 때 ‘직업에 귀천 없다’는 말은 그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 차원의 행복 지수도 높아지고, 국가 발전의 동력도 더욱 강해지지 않겠는가?

서열화된 사농공상 프레임, 이젠 결별해야

필자는 1975년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한 공직 생활을 30여 년 만에 마무리하고 2006년 말 민간 부문에 합류했다. 주된 업무는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와 더불어 모교에서 후학들에게 공직에서 쌓은 경험을 전수하면서 각종 비영리 단체에서 봉사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런데 공직을 떠난 지 15년을 넘긴 지금도 “이번에는 좀 더 중요한 일을 하셔야지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분들이 필자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 리가 없건만, 이렇게 말하는 데는 필자가 하는 일이 공직보다 덜 중요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렸다. 이는 우리 사회에 공직, 소위 ‘선비’가 하는 일이 가장 귀하고 농공상은 그 아래에 해당한다는 ‘수직적 사농공상’ 인식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는 1973년에야 비로소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은행이 정한 빈곤선인 하루 1달러, 연간 365달러를 넘어섰다. 단기 4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지만 ‘하루 세끼’ 밥 문제를 최초로 해결하게 된 것은 불과 50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유능한 인재는 정부에 들어가 공직에 종사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외국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를 정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예로 들곤 한다. 국토 면적은 비록 세계 108위의 작은 나라지만 국내총생산(GDP), 수출입 규모 등으로 볼 때는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다. 삼성전자나 현대·SK·LG 등은 이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뿐이 아니다. 벤처기업 가운데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유니콘을 넘어 100억 달러 이상인 데카콘을 바라보는 기업도 생기고 있다. 영화·음악·스포츠 등 예체능 분야에서 한류를 주도하는 인재들은 경제적 성공을 넘어 민간 외교 사절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국가적 엘리트가 더는 공직에만 몰리지 않고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도전하고 성공을 이루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느냐,그렇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이제는 과거의 ‘수직적 사농공상’ 프레임을 과감하게 깨고 각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자긍심을 가지면서 남이 하는 일도 존중하고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성숙을 동시에 갖춘 선진국 도약의 토양이 마련되리라 믿는다.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 주임교수, 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