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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다시 부르는 6·25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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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일성-스탈린-마오 합작 전쟁

72년 지난 지금도 정세 그대로

북핵 직시해야 평화 지킬수 있어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The Buck Stops Here'.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잘 알려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33대,1945년 4월~1953년 9월)의 좌우명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란 뜻. 결단에 이르는 대통령의 고뇌도 담겼다. 2차 세계대전 종결과 냉전 돌입, 한국전쟁 등 격랑의 세계사 한복판에 있던 트루먼은 일본에 원폭 투하를 승인할 때 이 좌우명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결단"은 다른 데 있었다. 퇴임 후 미주리주 인디펜던스로 귀향해 학생들을 자주 만났다. "대통령으로서 어떤 결정이 가장 힘들었냐"는 질문에 매번 이렇게 답했다. "한국전 참전을 결심했을 때다." 6·25를 '공산세력의 불법 침략'으로 규정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지킬 것"이라고 했지만, 전사한 미국 청년 3만6940명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거다. 우리 국군은 13만 7899명이 산화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탱크 등을 몰고 38분계선을 넘은 북한 인민군. 전날 국군은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많은 병력이 병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북한군은 손쉽게 서울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탱크 등을 몰고 38분계선을 넘은 북한 인민군. 전날 국군은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많은 병력이 병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북한군은 손쉽게 서울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전날 밤부터 내린 비가 이어졌다.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T-34 탱크 242대, 전투기 170대를 몰고 인민군 7개 사단, 1개 전차여단이 38분계선을 넘었다. 1129일 비극의 시작이다. 국군은 전날 비상경계령을 풀고 사병들에게 농촌의 모내기를 도우라며 2주간의 특별휴가를 보냈다. 군 수뇌부도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무방비였다. 주말 고향에서 쉬던 트루먼은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북한군 남침' 보고를 받았다. "딘,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개XX들을 막아야 합니다." 스탈린이 뒤에 있음을 간파한 그는 밤새 "마오쩌둥은 무슨 짓을 할까, 소련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한국전쟁이 "20세기 국지전 중 가장 혹독한 전쟁"(새뮤얼 마셜)이 된 건 '그림자 없는 유령' 중공군과 험준한 한반도 지형·추위 탓이었다. "산과 산이 이어져 전차는 쓸모없었다" "영하 40도, 장진호를 포위한 중공군은 '고향 들판의 하늘거리는 밀밭'처럼, 악몽처럼 다가왔다(19세 하사 레리 데이비스)." (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 김일성은 박헌영을 데리고 스탈린을 찾아가 "북조선이 첫 신호를 보내면 남조선 인민들이 집단 봉기할 것"(1950년 4월)이라고 했다. 스탈린과 마오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 무모한 김일성을 지원했다. 10월19일 18만, 11월 초 12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6·25 72주년이 다가온다.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어찌 잊으랴' 하던 6·25의 노래도, 전쟁 그 자체도 점차 잊혔다. 어느 사이 '통일' 담론이 사회를 더 지배했다. 여러 성향의 역대 정부가 펼친 수십 년 노력에도, '상기하자 6·25'란 표어를 소환해야 하는 정세가 전개되고 있다. 김일성의 외모까지 흉내 낸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 한국을 노골적으로 핵으로 위협하고 있다. 북한 핵은 이제 '실존적 위협'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속전속결로 삼키려 했다. 자유국가들이 단합하면서 신냉전 흐름은 더 커졌다. 젤린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연설은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현지시간)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장면 주미 대사가 무기 원조와 파병을 요청한, 간절한 연설의 데자뷔다. 한국전엔 16개국이 파병했고, 60여 개국이 한국을 지원했다.
얼마 전 중국은 미사일 도발을 놓고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반대하며 "누군가 전쟁의 불길을 확산한다면 중국도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비슷한 국제 정세에 김일성과 스탈린·마오쩌둥이 김정은과 푸틴과 시진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한국의 위상이 달라졌다. 탱크 한 대 없던 나라가 GDP 기준 세계 경제 10위권, 민주주의 만개한 문화 매력 국가가 됐다. 꽃다운 이들이 '맨주먹 붉은 피로/자유를 위하여 싸우고 또 싸워' 빛낼 수 있었던 이 나라 이 겨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SNS에 책 『짱깨주의의 탄생』을 추천했다. "동의와 지지가 아니다"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그동안 6·25 도발 주체를 언급하지 않고,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 하고, 백선엽 장군을 홀대한 행위의 해설서란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든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외교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 체제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국가의 안보,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다.
'6·25의 노래'는 자연과 생명을 노래한 청록파의 시인 박두진이 작사하고 김동진이 곡을 붙였다.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라는 다짐에 평화는 온다. 72년 전과 안보지형이 그대로 일 땐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