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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범, 평소 “시너 들고 간다” 협박…6년전 악연이 참사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평소에는 ‘형님’이라며 예우하다가도, 늦은 밤 술에 취한 채 전화해 ‘시너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다. 차에 실려 있는 시너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내 왔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비슷한 일을 당한 주변인들이 여럿이다.”

12일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지난 9일 발생한 대구법원 인근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 희생자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 [뉴스1]

12일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지난 9일 발생한 대구법원 인근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 희생자 장례식이 엄수되고 있다. [뉴스1]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화재 참사의 방화 용의자 천모(53·사망)씨의 지인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5년 전 수억 원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아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천씨가 갑자기 ‘이중 변제를 받아 문제가 있다’며 자신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지인 B씨 얘기다.

지난 9일 오전 10시 55분쯤 소방당국에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 6분 뒤인 오전 11시 1분 화재 현장에 소방차가 도착했고, 차량 50여 대와 인력 160여 명이 투입돼 신고 22분 만인 11시 17분쯤 불이 꺼졌다. 불을 끄고 건물 안을 수색한 소방당국은 이 건물 2층 203호에서 모두 7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남자 5명, 여자 2명이었다.

화재 원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경찰이 폐쇄회로TV(CCTV) 분석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용의자 천씨가 인화물질을 들고 건물 2층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다.

법조계에선 재판부나 검찰 등이 아닌 상대방 변호사를 범행 목표로 삼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방화 용의자 천씨와 변호사 C씨 사이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6년여 전인 201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씨가 대구 수성구에서 이뤄지는 재개발 사업에 수억 원을 투자했다가 돌려받지 못하자 시행사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시행사 쪽 변호인이 C변호사였다. C변호사는 이날 출장으로 화를 면했고, 함께 근무하던 김모(57) 변호사와 직원들이 숨졌다.

천씨는 재개발 사업 시행사와 2013년 11월 투자약정을 체결하고 2014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10차례에 걸쳐 3억6500만 원을 지급했다. 이보다 앞서 투자했던 3억2000만 원까지 합치면 천씨의 총투자금은 6억8500만 원이다.

이후 천씨는 투자 지연손해금 청구와 함께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2019년 지연손해금 지급만 인용 판결했다. 이에 천씨는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지적하며 8억2000여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소송을 추가로 냈다가 지난해 패소했다.

여기에 화재사건 하루 전날인 지난 8일에는 천씨가 시행사 대표에 대한 별도의 명예훼손 재판에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범행 1시간 전 재판에서도 졌다. 천씨는 투자 신탁사를 상대로 5억9000만 원대 추심금 청구 소송을 제기한 바 있는 데, 이날 이 소송에서도 패소한 것이다. 이런 여러 재판 결과가 ‘도화선’이 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경찰은 구체적인 범행 경위 파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대구경찰청은 12일 용의자 천씨가 범행에 사용한 휘발유 구입 경로와 시기 등을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일단) 휘발유 구입 경로가 확인되면 천씨가 범행을 언제부터 계획했는지, 범행에 휘발유를 얼마나 사용했는지 등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최종 사망 원인과 현장에서 발견된 길이 11㎝짜리 흉기가 범행에 사용됐는지 여부 등도 조사 중이다. 전날 국과수는 사망자 7명의 사인이 모두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된다는 1차 소견을 냈다. 국과수는 김 변호사를 포함한 사망자 2명에게서 흉기에 찔린 상처(자상)가 발견됐지만, 직접적 사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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