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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승호가 고발한다

이준석도 못피한 '싸가지' 공격…정치혁신 막는 기득권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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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임승호 국민의힘 전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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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 권성동 원내대표, 이준석 대표. 그래픽=김현서 기자

왼쪽부터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 권성동 원내대표, 이준석 대표. 그래픽=김현서 기자

싸가지. 사람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데, 젊은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바로 이것 아닐까 싶다. ‘새파랗게 젊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같은 수식어는 덤으로 따라붙는다. 젊은 정치인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싸가지론’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사람은 단연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일 것이다. 최근 그가 SNS에 올린 ‘1년 내내 흔들어놓고는 무슨 싸가지를 논하냐’는 문장은 이 대표가 싸가지론에 얼마나 시달려왔는지 잘 보여준다.

당 대변인으로 일하면서 그보다 어린 나조차 이 대표의 아슬아슬한 표현 수위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대표가 SNS에 글을 올릴 때마다 마음 졸이며 내용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이준석식 표현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싸가지론이 이 대표를 포함해 젊은 정치인들의 언로를 막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현실은 이와 별개로 매우 심각한 문제다.

젊은 세대 언로 막는 요술방망이 

이 대표를 향한 가장 최근의 ‘싸가지 공격’은 당 중진 정진석 의원과의 설전에서 비롯됐다. 이 대표가 지난 6·1 지방선거 대승과 동시에 혁신위원회를 띄우자마자 당내의 불편한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 의원이 이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비판하며 ‘혁신도 좋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국정을 뒷받침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라며 포문을 열었다. 정 의원의 비판엔 '우크라이나 행이 이 대표의 자기 정치'라는 내용도 있었지만, 사실 이는 본질을 가리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혁신위와 관련한 불편함이 시발점이었다. 그가 최재형 혁신위원장을 소위 ‘이준석계’로 몰아붙인 것만 봐도 설전의 본질이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혁신위라는 걸 보여준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6월 8일 페이스북 글. [SNS 캡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6월 8일 페이스북 글. [SNS 캡처]

당 대표가 출범시켰다고 해서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건설적 비판과 논의는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 시기를 놓고도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대표와 연관되기만 하면 늘 그래왔듯이 이번 역시 결국 싸가지 논쟁, 나이 논쟁으로 변질하였다. 정 의원은 SNS에 이 대표를 비판하며 본인이 다선 의원이자 정치 선배라는 걸 강조했다. 그리고 뒤이어 ‘정치 대선배가 조언하는데 당 대표가 왜 싸우려 드냐' ‘중진 선배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는 정치 평론가들의 논평이 줄을 이었다. 논의 내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이 대표 나이와 싸가지를 따져보는 촌극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니 치열한 토론이 벌어질 턱이 없고 결국 ‘둘 다 잘못했으니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양비론으로 끝났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게 있다. 이 대표는 왜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혁신위라는 불을 지폈을까. 답은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의 볼썽사나운 모습들에 있다. 지방선거 대승 덕에 조용히 지나가는 모양새지만, 사실 국민의힘은 완패한 더불어민주당 못지않은 잡음을 일으켰다. 민주당보다 더 부끄러운 지점도 많았다. 선거 승리에 취해 이런 실수를 복기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독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선거 압승이라는 화려한 성적표에 가려진 국민의힘의 부끄러운 민낯 일부를 들춰보려 한다.

승리에 묻힌 공천 구태 

가장 눈살을 찌푸린 지점은 전과자 후보의 수였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은 1035명의 전과 후보자를 공천했다. 비율로 따지면 35.4%로 원내정당 중 가장 높다. 특히 음주운전 전과자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지난 2019년 윤창호법 시행 이후에 음주운전을 저지른 후보까지 여러 명을 공천했다. 솔직히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대선 기간 내내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음주운전 전력 등을 공격했던 정당의 공천이라 믿기 힘들었다. 모든 전과 후보자의 피선거권을 원천 차단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스스로 약속했던 기준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현실적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쳐도 민주당보다는 전과 후보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보다 관대했다. 약속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없었던 거다.

고질적인 문제인 ‘비례대표 깜깜이 공천’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이준석 대표는 올해 초 광역의원 비례대표 상위 순번을 토론배틀로 선발하겠다고 약속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이준석 대표가 당시 몸담았던 바른미래당이 토론배틀을 통해 광역 비례대표 후보를 공천했었고, 이번에도 도입하고자 한 것인데 무슨 이유인지 결국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천관리위원회에서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소식조차 없었다. 토론배틀만 정답이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상위 순번 비례대표 후보자가 어떤 기준으로 높은 순번을 받았는지 유권자가 알 수 있어야 했다. 반면 민주당은 청년비례대표 선발 공개오디션을 통해 일부 후보를 공개적으로 검증하고 공천했다. 비록 주목도는 낮았지만 모양은 갖춘 셈이다. 물론 국민의힘도 이 대표 주도로 PPAT(공직 후보자 기초자격평가)를 시행해 이목을 끌긴 했다. 그러나 변별력이 없었던 데다 심지어 무시험 후보까지 공천을 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납득 어려운 공관위 결정

지난 4월 국민의힘 공천 배제 결정해 반발해 단식 농성을 하는 김진태 강원도지사 당선인. 논란 끝에 당의 결정이 번복됐고, 결국 경선을 거쳐 도지사 후보 공천을 받았다. [뉴스1]

지난 4월 국민의힘 공천 배제 결정해 반발해 단식 농성을 하는 김진태 강원도지사 당선인. 논란 끝에 당의 결정이 번복됐고, 결국 경선을 거쳐 도지사 후보 공천을 받았다. [뉴스1]

김진태 강원도지사 당선인이 경선 당시 컷오프됐던 건 지난 지방선거 당시 불거진 가장 큰 잡음이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김진태 후보가 컷오프된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공관위 측에서는 2019년 김 후보의 5·18 민주화운동 관련 문제 발언이 국민 통합에 저해된다는 취지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2020년 총선에서 이미 공천을 받은 바 있었기에 공관위의 명분은 너무나도 약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관위 결정이 번복되고 김 후보는 당선되었다. 하지만 당시 공관위가 왜 그러한 결정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김진태 당선인 사례 외에도 공관위는 여론조사와 상반된 결정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물론 여론조사에 절대적으로 집착할 필요는 없다. 당의 전략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당원과 유권자가 수긍할만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이번 선거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기에 설전 속에 반성적 토론이 있길 바랐다. 그러나 무의미한 싸가지 논쟁 속에서 자기성찰적 토론은 찾을 수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싸가지론이 수그러들기는커녕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아무리 당 대표라 할지라도 나이가 어리면 연장자와 정치 선배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대화해야 한다.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대화하려고 하면 싹수없고, 건방지고, 당내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싸가지론은 기성 정치인들이 젊은 정치인들의 언로를 막는 효율적 도구로 요긴하게 쓰인다.

이제 싸가지를 버리자 

이제 40대를 바라보는, 나보다 9살이나 많아 솔직히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한 이 대표가 여전히 싸가지론에 시달리는 걸 보며 젊은 정치인들은 복잡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당내 가장 높은 직책인 당 대표도 싸가지의 무게에 시달리는데, 그런 타이틀도 없다면 싸가지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하지 않겠는가. 민주당이 박지현 전 공동비대위원장을 대했던 무례한 태도를 보면, 국민의힘은 그나마 낫다고 위안해야 할까. 선거철마다 모든 정당이 청년 정치 운운하지만 젊은 정치인들이 짊어진 싸가지의 무게는 도통 가벼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지고 있는 싸가지의 무게를 덜어주는 게 정당 혁신의 시작 아닐까. 나이가 많은 것도, 나이가 적은 것도 벼슬이 아니다. 다만 젊은 정치인들이 상대가 누구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평등하게 대화하는 문화는 필요하다.

젊은 정치인 군기 잡는 싸가지라는 도구를 이제는 버리자. 나이와 무관하게, 선수(選數)와 무관하게 논리와 이성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정치 문화를 정착시키자. 나의 ‘싸가지 없는’ 조언이 젊은 정치인들의 허리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