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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펠러 비행기도 없이 조종사 키우라고? ‘반도체 증원’의 그림자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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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반도체 인재 투자’에 팔을 걷어붙였다. 윤 대통령이 지난 7일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산업은 인재를 키워내는 게 핵심”이라며 인재 양성을 강력히 주문하면서다. 9일엔 한덕수 국무총리가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산업에 정책적 노력을 집중하겠다. 수도권과 지방에 거의 비슷한 숫자의 증원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국가적 명제에 40년 넘게 막혀 있는 수도권 대학 정원 정책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그만큼 반도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반도체는 전자산업의 쌀로 불린다. 인공지능과 로봇, 드론, 스마트시티 등으로 대표되는 4차산업혁명을 ‘작동’시키는 핵심 기반기술이다. 게다가 미·중 패권 경쟁을 겪으면서 반도체가 국가 전략자산으로 부상했다.

반도체업계는 그동안 전문인력 부족 문제를 꾸준히 호소해왔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앞으로 10년간 매년 3000명씩, 3만여 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입시업계에 따르면 전국 20여 개 대학에 반도체 관련 학과가 설치돼 있다. 시스템반도체공학과나 물리반도체학부, 지능형반도체공학과 등 학과명과 주요 교육내용이 다양하다. 입학 정원은 1400명쯤 된다. 아직은 신설 학과가 많아 졸업생은 650여 명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해 국내 반도체 업계는 한해 1만3000~1만500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전공 졸업생이 모두 관련 업체에 취업한다고 해도 10분의 1이 안 되는 셈이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향후 5년간 8만 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반도체 부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대학 정원을 늘린다고 반도체 인재난이 해결될까. 업계는 “인력난을 해소하는 첫 단추를 끼운 것”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교육의 질’을 우려한다.

무엇보다 전문 교수진 확보가 시급하다. 유능한 인력일수록 처우가 좋은 산업체 근무를 선호한다. 대학은 14년째 등록금 동결로 재정 여력에 한계가 있다. 최근 몇몇 대학에 설치된 반도체 계약학과의 경우 4~5년 단위로 계약이 이뤄져 교수 정년이 보장되지 않아 고급 인재가 지원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별도의 연구기금을 마련해 반도체 연구교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껏 반도체 전공이 마련된 대학에도 실험·실습 장비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수도권의 한 사립대 A교수는 “대부분의 대학은 제대로 된 팹(공장) 설비는 고사하고 클린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형편이다. 기초적인 실습도 어렵다는 뜻”이라고 토로했다. 반도체 장비가 워낙 고가다 보니 중소 규모의 대학에선 1년 예산을 모두 쏟아부어도 중고 설비 몇 대 사지 못한다. 이어지는 A교수의 말이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외경. [사진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외경. [사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천 M16 공장 전경. [사진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이천 M16 공장 전경. [사진 SK하이닉스]

“반도체처럼 첨단학과는 실습에 큰돈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턱대고 정원만 늘려놓았다가 제대로 장비 한 번 다뤄보지 못한 졸업생이 나올 수 있다. 프로펠러 달린 경비행기도 제대로 조종해본 적이 없는데 최신 장비를 장착한 민항기 조종사를 양성하겠다는 꼴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에서 구형 제품을 기부받는 것도 쉽지 않다. 이들 반도체 업체에선 매년 수천 대의 구형 라인과 유휴설비 자산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에서는 신형 제품을 만들 수 없지만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교육용으로는 활용 가능하다.

그런데 기업 입장에선 기증도 함부로 못 한다. 기업 관계자는 “가끔 대학이나 국책연구기관에 구형 장비를 기증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한 대학에 기부하면 다른 대학들이 ‘우리도 지원해 달라’고 온갖 로비가 들어온다. 대응이 상당히 난처하다”고 전했다.

이번 반도체 학과 증원 정책이나 계약학과 도입에 대해 대기업 쏠림을 우려하기도 한다. 최재성 극동대 반도체장비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를 제외한 중견중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에도 연구개발이나 제조 인력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이들 기업과 매칭하는 산학협동 프로그램, 현장수업 활성화 등을 보다 적극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학과 증원도 필요하지만 이공계 융합형 교육과정을 확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수도권 대학 B교수의 얘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차세대 반도체는 물리학과 전자·전기공학, 재료공학, 화학공학이 만나 시너지를 내야 한다. ‘무조건 반도체 전공자가 한해 3000명은 돼야 한다’는 식의 획일적 사고는 곤란하다. 단기간에 특정 학과만 정원을 늘리면 중장기적으로 인재 수급 불균형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최근 10년 새 인기를 끌었던 전·화·기(전자·화학·기계공학과) 학과 중 내연기관 차량 개발을 중단하면서 기계공학과가 주춤하는 것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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