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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얼굴만 싹뚝…1000t 애물단지 선거 현수막의 변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에 폐현수막이 쌓여있다. 편광현 기자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에 폐현수막이 쌓여있다. 편광현 기자

쓰레기사용설명서는...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마라. 다시 보면 보물이니"
기후변화의 시대, 쓰레기는 더 이상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재활용·자원화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중앙일보 환경 담당 기자들이 전하는 쓰레기의 모든 것. 나와 지구를 사랑하는 '제로웨이스트' 세대에게 필요한 정보를 직접 따져보고 알려드립니다.

선거철 곳곳에 걸렸던 현수막은 어디로 갔을까?
현수막은 플라스틱 일종인 폴리에스터가 함유돼 소각하면 다이옥신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또 잉크가 묻은데다 야외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재활용도 어렵다. '선거 쓰레기' 중에서도 처리가 어려운 애물단지다.

[쓰레기사용설명서] 8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6.1 지방선거에 사용된 현수막은 12만8000여장. 한 줄로 이으면 서울부터 도쿄까지 거리(1281㎞)에 달한다. 최근 5년간 선거철마다 1000여t의 현수막이 버려졌지만 재활용률은 20~25%를 맴돌았다.

재활용되지 못하면 대부분 소각장으로 향한다. 늘 사용량을 줄이자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실제론 줄지 않았다. 선거 현수막 관련 규정이 오히려 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버려진 현수막이 새롭게 태어나는 현장을 찾아가봤다.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 편광현 기자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 편광현 기자

현수막 1장에 마대 2자루

지난 8일 오전 10시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마을기업 녹색발전소. 작업장 한편엔 길이 6~10m인 현수막이 가득 쌓여있었다. 가장 앞쪽엔 지선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이름과 정당이 적힌 선거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뒤쪽엔 아파트 분양업체나 온천의 광고 현수막도 보였다. 작업자 2명이 현수막에서 노끈과 나무막대를 분리해 한 곳에 모았다. 선거 현수막에서는 정치인의 얼굴 부분만 도려냈다.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 편광현 기자

지난 8일 오전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한 마을기업. 편광현 기자

옆 제작실에선 또 다른 작업자 4명이 재봉틀 앞에서 재활용 상품을 만들고 있었다. 현수막 1장이 에코백 6개 또는 마대 2자루로 변했다. 현수막을 1, 2차로 재봉한 뒤 끈을 달고 뒤집는 작업을 하면 가방이 완성됐다. 마대는 그보다 공정이 간단했다. 한편에 높게 쌓인 에코백의 가격은 개당 2000~4000원, 마대는 개당 2000원이라고 했다.

현수막 상품 소비자는 주로 지자체나 정부부처, 민간 제조업체 등이다. 특히 지난해엔 해경, 농어촌공사, 자동차정비소 등에서 쓰레기 마대를 대량으로 구입해 생산량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18년간 녹색발전소를 운영한 김순철 대표는 "정책 홍보 문구를 붙인 에코백과 쓰레기를 담는 마대가 가장 잘 팔린다"고 말했다.

신발·밧줄은 실패, 한복·가구는 실험 중

가방·마대 이외 현수막 재활용 상품은 대부분 수요처를 찾는 데 실패했다. 신발과 밧줄이 대표적이다. 예전엔 현수막으로 만든 신발도 있었지만 가격이 4만원 정도라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보내다가 결국 국내 생산이 중단됐다. 어촌에서 사용할 용도로 만들어진 현수막 밧줄은 물에 젖으면 무거워지고 금방 부식된다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다만 최근에도 다양한 현수막 재활용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새활용플라자는 6·1 지방선거 직후 수거한 현수막 3580장으로 지갑, 파우치, 파라솔, 우산, 한복 등을 만들어냈다. 서울 남산도서관은 폐 현수막으로 제작한 벤치, 선반 등을 이용해 야외 독서공간을 건축하는 중이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면 평소 민간에서 발생하는 폐 현수막도 디자인 제품으로 재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현수막으로 만든 우산과 의류. 뉴시스

현수막으로 만든 우산과 의류. 뉴시스

하지만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질만한 건 사실상 쓰레기 수거용 마대와 에코백뿐이라고 말한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재활용이 어려운 현수막은 에코백이나 마대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며 "그마저도 생산비용이 비싸서 시중 제품을 모두 대체하긴 어렵다"고 했다.

'친환경 현수막'은 선관위가 거부

'친환경 현수막'을 만든다는 사회적 기업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현수막 위에 얇은 플라스틱 필름을 덧대는 방식이다. 플라스틱 필름 위에 특수잉크로 홍보문구를 적고 선거가 끝나면 지우는 방식이다. 사용한 현수막을 다음 선거 때 쓰거나, 천과 투명 필름을 별도로 분리 배출할 수 있어 재활용률이 크게 오른다.

다만 업체에 따르면 이런 방식의 친환경 현수막은 불법 판정을 받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규칙상 선거홍보용 현수막에 어떠한 물질도 붙어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김광일 제이환경 대표는 "대량 생산 시 생산비를 시중의 고급 현수막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다. 다만 정당에서 대량 생산을 맡길 수 있게 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현수막을 재활용해서 만든 에코백. 편광현 기자

현수막을 재활용해서 만든 에코백. 편광현 기자

결국 현수막은 환경을 위해 사용을 줄이는 게 답이다. 특히 선거용 현수막은 민간업체가 만든 현수막보다 잉크와 도료가 진해 폐자원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현수막이 없어도 디지털 공간을 통해 정책홍보가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홍수열 소장은 "기본적으로 현수막은 재활용보다 사용량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 현수막이 정 필요하다면 전자책에서 쓰는 기술인 E 잉크 기술 등으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허승은 녹색연합팀장은 "후보자 득표율이 10% 이상이면 선거 비용의 절반, 15% 이상이면 전액을 보전받는다. 더는 세금으로 선거 쓰레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현수막 사용을 금지하도록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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