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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놈들" 망국의 한 달랬다…장지연 온종일 마신 청주의 정체 [e슐랭 토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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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사가 시국 한탄…말술로 마신 마산 청주

“(위암 장지연 선생이) 병원에서 작고하기까지 시국을 개탄하며 아침부터 취침할 때까지 술로써 울분을 토했다.”

옛 경남 마산의 언론인 김형윤(1903~1973)이 기록한 『마산야화』 속 내용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국지사인 위암 장지연(1864~1921)의 말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위암은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후 마산에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이날에 목놓아 운다’는 의미의 시일야방성대곡은 각종 부당함이나 억울함을 강조하는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인용되는 명문이다.

당시 기록에는 “(위암이) 술을 수정(마산 수성동) 석교양조장에서 판매한 대전청주를 두주(斗酒·말술)로 비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거나하게 취하면 (일본인들을 향해) ‘개 같은 놈들…’을 연발했다”라고도 썼다. 위암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를 온종일 마시며 시국을 개탄했다는 내용이다. 위암의 묘는 현재 마산합포구 현동에 있다.

그가 집안에 비치한 술의 양을 ‘두주’라고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애주가들 사이에서 흔히들 쓰는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 말이 절로 연상된다. 우리말로 ‘말술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사자성어는 주량이 매우 큰 사람을 일컫는다.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과 국권을 잃은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 [중앙포토]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과 국권을 잃은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 [중앙포토]

좋은 물·쌀·기후…국내 최대 청주 생산지

망국의 한을 술로 달래던 위암 선생이 청주를 말술로 들일 수 있었던 데는 마산의 당시 상황과 연관이 깊다. 일제강점기 당시 마산은 청주와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이 크게 번성했다. 일본인들이 1889년 개항 후 좋은 물과 쌀, 기후를 갖춘 마산에 술과 간장공장을 세운 게 시작이다.

마산의 첫 청주 공장은 1904년 일본인 아즈마가 세운 아즈마 양조장이다. 이후 1920년대에는 10개가 넘는 양조장이 들어설 정도로 주류생산이 번성했다. 1928년에는 마산의 12개 청주공장에서 1만1000석(1석=15말, 198만ℓ)의 청주를 생산하기도 했다.

높이 26.5cm, 입지름 6.2cm, 바닥지름 19cm 크기의 ‘술춘’. 술을 담아 저장하거나 운반할 때 사용한 용기로 몸체 앞면에는 '마산주(馬山酒)', 양옆에는 '방순(芳醇·향기롭고 맛이 좋은 술)', '무비(無比·비할 데가 없이 뛰어남)'라고 적혀 있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높이 26.5cm, 입지름 6.2cm, 바닥지름 19cm 크기의 ‘술춘’. 술을 담아 저장하거나 운반할 때 사용한 용기로 몸체 앞면에는 '마산주(馬山酒)', 양옆에는 '방순(芳醇·향기롭고 맛이 좋은 술)', '무비(無比·비할 데가 없이 뛰어남)'라고 적혀 있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만주로 뻗어간 ‘청주’…“나다자케와 맞먹어”

마산의 술은 당시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명성을 떨쳤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선 ‘조선의 나다주(朝鮮灘酒)’로 통할 정도였다. 나다자케는 일본 고베시 효고(兵庫)현 나다(灘)지방의 최고급 전통술을 말한다. 그만큼 당시 마산이 ‘주도(酒都·술의 도시)’로 유명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기록된『마산항지』에는 “마산에서는 13개 양조업자가 향기 좋은 나다(灘)의 술과 맞먹는 명주를 양조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내는 물론 멀리 만주까지 수출하여 ‘조선의 나다주’로 불리며 크게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라고도 썼다.

『마산항지』는 마산에서 20여년간 신문기자로 일한 일본인 스와 시로가 쓴 책이다. 그는 “풍미에서는 마산의 것이 나다 청주를 능가하는 것이 있으니”라며 마산 청주를 추앙하기도 했다.

1937년 마산부에서 만든 ‘관광의 마산(?光の馬山)’ 리플렛 표지. 마산을 병풍처럼 감싼 무학산,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이 떠 있는 마산 앞바다가 그려져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풍 술통이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1937년 마산부에서 만든 ‘관광의 마산(?光の馬山)’ 리플렛 표지. 마산을 병풍처럼 감싼 무학산,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이 떠 있는 마산 앞바다가 그려져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풍 술통이다.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사라진 전통주…일제 후 ‘잃어버린 100년’ 

국내 청주 1위 생산지인 '주도' 마산의 명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해방 후 막걸리보다 비싼 청주를 찾는 수요가 줄어든 데다 1973년에는 정부의 통폐합 조치까지 맞물렸다. 결국 10개가 넘던 마산의 청주공장 중 백광양조장이 문을 닫으면서 청주의 명성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주류업계나 전문가들은 “우리의 전통주는 일제강점기 이후 이른바 ‘잃어버린 100년’을 겪었다”고 말한다. 1909년 일제에 의해 주세법이 제정되면서 가양주(家釀酒)에 세금을 부과한게 시작이다. 조선시대 각 가정에서 술을 빚던 가양주에 세금을 물리자 수백종에 달했던 전통주가 크게 위축됐다.

이후 1916년 조선총독부가 주세령을 실시하자 가양주 제조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다. 일제가 가양주에 대해 면허를 받도록 통제에 나선 탓이다. 주세령이 내려질 당시 술을 일본주와 조선주로 나눈 것도 전통주가 사라지게 된 원인이 됐다. 당시 일제가 탁주와 약주는 조선술로, 청주는 일본술로 분류하면서 마치 청주는 일본의 것으로 인식되게 했다.

옛 경남 마산의 이시마시(석교) 양조장. 허정도 경남도 총괄건축가 제공

옛 경남 마산의 이시마시(석교) 양조장. 허정도 경남도 총괄건축가 제공

“청주, 백제 사람이 전수…일본의 주신(酒神)”

당시 일제가 청주를 자신들의 전통주로 각인시키려한 데는 태생적인 한계에서 출발한다는 견해가 많다. 일본인들이 가장 즐기는 술인 청주가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주종이어서다. 일본의 최고(最古) 기록인 『고사기(古事記)』에는 ‘백제 사람 인번(仁番)이 누룩을 이용한 술 빚는 기술을 전해왔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청주의 기원이 3세기경 백제에서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해주면서 비롯됐다는 사료다.

당시 『고사기』에는 ‘(일본) 천황이 이 술을 마시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며, 인번을 주신(酒神)으로 모셨다’는 기록도 나온다. 청주는 삼국시대 백제 사람 인번이 일본에 전해준 술이며, 그는 일본의 주신이 됐다는 취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옛 경남 마산의 일본 청주 양조장. 허정도 경남도 총괄건축가 제공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옛 경남 마산의 일본 청주 양조장. 허정도 경남도 총괄건축가 제공

세금부과·밀주단속 등 가양주 가시밭길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가양주나 전통주의 쇠락은 계속됐다. 해방 후 6·25 전쟁 등에 따른 식량난 때문에 사사로이 술을 빚는 밀주 단속이 이어졌다. 1965년에는 ‘양곡관리법’이 발표되면서 밀주단속이 강화되면서 전통주는 더욱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가양주 금지 정책은 1995년에야 사라졌다. 이를 놓고 박록담 한국전통주연구소장은 『한국의 전통명주 1 – 다시 쓰는 주방문』을 통해 ‘지난 80년간의 시간은 그간 단절되었던 가전비법의 가양주를 되살리기엔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고 했다.

발효를 거친 술밑(쌀에 누룩을 섞어 버무린 지에밥)을 채에 거르자 동동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안대훈 기자

발효를 거친 술밑(쌀에 누룩을 섞어 버무린 지에밥)을 채에 거르자 동동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안대훈 기자

“전통술 찾자”…4월 첫 마산주 대회

마산은 이런 국내 주조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만주대륙까지 명성을 떨쳤던 청주는 물론이고 지역의 전통술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지난 4월 열린 ‘제1회 창원(마산) 전통주 대회’에는 이런 마산의 술 역사가 담겨있다. ‘창원의 술 뿌리를 찾아서’라는 부제로 열린 행사는 잃어버린 전통주를 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회는 여러 참가자가 각자의 전통 방식으로 빚은 술을 출품해 경합을 벌였다.

이 대회는 창원의 전통주 공방인 ‘전통주 이야기’ 허승호 대표가 주최했다. 허 대표는 한국 전통주의 대부로 불리는 박록담 소장을 비롯해 전통주 장인들을 찾아 서울, 전라도, 충청도 돌아다니며 전통주 부활에 앞장서왔다.

경남 창원의 전통주 공방 '전통주 이야기'. 직접 빚은 우리 전통주가 항아리에 담겨 발효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안대훈 기자

경남 창원의 전통주 공방 '전통주 이야기'. 직접 빚은 우리 전통주가 항아리에 담겨 발효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청주는 우리술…“일제가 사케를 청주로 한정”

앞서 2019년 그는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린 우리 술 ‘청주’의 이름을 되찾자”는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허 대표는 “본래 청주는 우리 조상들이 썼던 말인데, 일제가 자기들 술인 ‘사케’를 청주로 한정하고, 우리 술을 ‘약주’라고 규정해버린 영향이 지금도 이어진다”고 했다.

허 대표는 또 “일본 청주와 우리 청주는 누룩이 다르기 때문에 맛과 향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인공적으로 특정 효모만 키우는 배양누룩을 써 깔끔한 맛이 장점일 수 있지만 일정하고 단조롭다”며 “우리는 자연에서 배양한 천연누룩을 써 맛이 다양하고 풍부한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내 전통주는 여러 전문가들의 부활 움직임과 젊은층의 선호 현상 등이 맞물리면 시장이 날로 커지는 추세다.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출고금액을 기준으로 한 전통주 시장 규모는 2018년 456억 원, 2019년 531억 원, 2020년 627억 원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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