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몽은 일본 생명선” 일 관동군, 중 동북 3성 침략 획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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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1〉 

만주의 친일세력과 기념사진을 남긴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앞줄 왼쪽 둘째). 1931년 9월 20일 선양. [사진 김명호]

만주의 친일세력과 기념사진을 남긴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앞줄 왼쪽 둘째). 1931년 9월 20일 선양. [사진 김명호]

만주(지금의 동북 3성)를 중국에서 분리하자는 주장은 20세기 초부터 있었다.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기간, 일본에 망명 중인 동맹회(同盟會) 고위층이 청(淸) 말의 풍운아 숙친왕(肅親王) 산치(善耆·선기)에게 서신을 보냈다. “황실을 선양(禪讓)하고 발상지 동북으로 돌아가라.”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911년 10월 10일 밤,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혁명군이 깃발을 날렸다. 웅크리고 있던 북양신군 영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혁명세력을 어르고 달랬다. 혁명가들이 주창하던 공화제를 수용하고 민국(民國) 수립을 선포했다. 봉건의 상징인 선통제 푸이(溥儀·부의)에게도 사탕발림을 안겨줬다. 쯔진청(紫禁城)에서 황제놀음 즐기되 외부출입은 금지했다. 눈만 뜨면 공화제를 노래하던 쑨원(孫文·손문)은 맥이 빠졌다. “위안스카이 대총통 만세”를 외치며 혁명파들이 씌워준 임시 대총통 모자를 제 손으로 벗어 던졌다.

민국 초기 숙친왕은 베이징을 떠났다. 동북의 다롄(大連)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종사당(宗社黨)을 출범시켰다. 일본을 등에 업고, 만주와 몽골을 중국에서 분리하기 위한 무장 폭동을 도모했다. 결과는 백일몽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인 80만 명 이상 만주로 이주

동북변방군 사령관 관저에 진입한 일본 관동군. [사진 김명호]

동북변방군 사령관 관저에 진입한 일본 관동군. [사진 김명호]

한반도를 침탈 후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 집착했다. 관동군 참모가 그럴듯한 이유를 글로 남겼다. “만주와 몽골은 제국의 조선 통치에 중요한 지역이다.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오면 조선 점령은 시간문제다. 만몽(滿蒙)은 일본의 생명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도 장려했다. 1930년, 간도(間島)와 안동현 일대에 자리 잡은 조선인이 80만 정도였다. 중국은 조선인을 일본의 앞잡이 정도로 치부했다. 일본은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했다.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1930년 봄, 산시(山西)군벌 옌시산(閻錫山·염석산)이 펑위샹(馮玉祥·풍옥상)과 연합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지막 군벌전쟁인 중원대전(中原大戰)의 막이 올랐다. 국가주의자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가 참전을 저울질하던 동북의 지배자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게 추파를 던졌다. “만주의 황인종이 소련 백인종의 식민지 백성 취급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다. 난징(南京) 국민정부에 예속된 만주를 해방한 후 ‘만주자주국(滿洲自主國)’을 선포하고 국가원수에 취임해라.” 30세 생일을 앞둔 약관의 청년 원수(元帥)는 만주의 독립과 국가원수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장제스를 지원하기 위해 막강한 동북군을 중원대전에 투입했다. 중원대전은 장제스와 장쉐량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쉐량은 베이징 이북과 만주 전역의 통치권을 확보한 중국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베이징에 거주하며 아편, 독서, 여자에 몰두했다.

1930년 10월, 일본 육군성 군사과장 나카다 데스잔(永田鐵山)이 공무로 동북을 방문했다.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동북 문제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제출했다. “동북 3성을 중국에서 이탈시킨 후 친일 독립정부 수립을 서둘러야 한다. 국가원수는 동북 계열의 원로 중 친일파를 내세우는 것이 합당하다.”

1920년대 말, 간도의 조선인 가족. [사진 김명호]

1920년대 말, 간도의 조선인 가족. [사진 김명호]

이듬해 3월 관동군은 동북 침략을 기획했다. 외곽 조직인 재만일본인자주동맹(在滿日本人自主同盟)을 전면에 내세웠다. 도쿄 히비야 공원에 71개 사회단체를 소집해 국민대회를 열었다. ‘신국가 건립’을 정부에 요구했다. 관동군은 본국의 우려를 무시했다. 1931년 6월 말,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관할 지역인 선양(瀋陽) 북부 류탸오후(柳條湖)에서 철로를 폭파하고 동북군 주둔지 북대영(北大營)을 점령한다.” 시간은 9월 28일로 정했다.

중국은 홍수로 난리였다. 후베이성은 60%가 물에 잠겼다. 수재민 2000만 명에 확인된 사망자가 만 명을 넘었다. 행방불명은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다른 성들도 비슷했다. 이 와중에도 동북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1931년 8월 25일, 선양 공안국이 관계 기관에 비밀 전문을 발송했다. “일본이 도발하면 대응을 자제해라. 저항은 금물이다.” 이틀 후, 관동군은 선양의 일본 교민들에게 총을 지급했다.

장제스 “공산 비적 섬멸이 절실”

9월 2일, 관동군이 선양공병창과 북대영 인근에서 야전 훈련을 했다. 다롄의 관동청이 도쿄의 외무성에 긴급 전문을 보냈다. “관동군 소장파 장교들이 중국 군대와 충돌을 도모한다.” 외무성이 선양 총영사에게 보낸 훈령을 소개한다. “근래에 관동군이 비축했던 자금을 푼다는 정보가 있으니 확인해서 보고해라. 국수주의자 낭인들이 중국과 전쟁을 획책 중이다. 낭인 단속을 철저히 하기 바란다.” 9월 6일, 베이징에 있던 장쉐량이 전화로 동북에 지시했다. “일본인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용인해라.”

9월 12일, 허베이(河北)성 스좌장(石家庄)에 장제스가 나타났다. 황급히 달려온 장쉐량에게 당부했다. “일본군의 동북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직 우리는 역량이 부족하다.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능하다. 대항하지 말라고 동북의 전군에 지시해라.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공산 비적 섬멸이다. 내부의 적을 소탕한 후에 침략자와 맞서는 것이 현명하다.” 9월 15일,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선양 특무기관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작전 개시를 예정보다 열흘 앞당긴 9월 18일, 토요일 밤 10시30분으로 확정했다. 9월 17일 밤, 선양의 일본재향군인회가 충혼비 앞에서 흑두건 뒤집어쓰고 집회를 열었다. “일본 권익 침해하는 천하의 난봉꾼 장쉐량 타도”를 두 번 외치고 흩어졌다.

9월 18일, 세계를 진동시킬 새날이 밝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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