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일곱 번 넘나든 사람, 현대사 태풍 속 생존 분투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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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호 27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 어느 실향민의 수기

38선을 일곱번 넘나든 뒤 월남한 아버지 남두용의 흔적을 찾아 나선 명애씨는 백마고지역에서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38선을 일곱번 넘나든 뒤 월남한 아버지 남두용의 흔적을 찾아 나선 명애씨는 백마고지역에서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한탄철교 남단,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 직접 세웠다는 38선 표지를 돌아보고는 한탄강을 건넜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올라와 한 폭의 수채화가 펼쳐졌다. 마침 한탄강 강변에 일찌감치 문을 연 카페가 보였다. 테라스의 테이블에 동반자들과 둘러앉아 쌉쌀한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아직 온기를 품고 있을 때 나는 이곳을 일곱 번 지나간 남두용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두용은 1920년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용성면, 지금의 청진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함경도의 명문 경성고보를 다녔다. 일본인 수학 선생의 실력이 형편없어 몇몇이 작당하여 백지 답안지를 내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 4학년(1938년)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경원선을 탔으니 철원 연천 전곡을 지나 한탄철교 남단 바로 이곳을 통과했다. 첫 번째 통과는 신나는 수학여행이었다.

총탄 자국이 선명한 한탄철교.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총탄 자국이 선명한 한탄철교.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로 진학한 남두용은 사고 치지 않고 대학을 다녔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반일운동은 국내와 만주 모두 질식할 정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그는 졸업하고 귀향하면서 또 한탄철교 그 지점을 통과했다.

귀향하자 학도병(1941년1월~45년8월)으로 끌려가게 됐다. 자포자기로 술독에 빠졌고 입대 후에는 체중이 48㎏까지 줄었다. 남두용은 마음을 고쳐먹고 중국이나 남방 전선으로 차출되면 탈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행이 발행한 1백 엔짜리 지폐로 2백 엔을 생존자금으로 마련했다. 도쿄 유학생 한 달 하숙비가 20엔이었으니 크다면 큰돈이었다. 그는 일본인 병사들의 호신용 부적인 오마모리라는 주머니에 현금을 넣고 다녔다.

남두용은 탈출자금을 준비하면서 군사훈련과 내무생활에 모범이 되려고 애썼고, 교관이 그를 조교로 삼았다. 덕분에 전선으로의 차출을 피할 수 있었다. 애국가 사건도 있었다. 남두용이 내무실 오락시간에 충동적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일본 병사들은 손뼉을 쳤다. 그러나 자신은 누군가 자신을 밀고할까 봐 몹시 불안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국가를 제대로 아는 조선인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남두용에게 일군의 조선인 병사들을 일본 아이치현까지 인솔해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다시 경원선 열차를 타고 한탄철교 남단의 38선 그 지점을 지났다. 이번에는 일본군으로서 공무출장이었다. 그렇게 더딘 시간이 흘렀고 두만강 철교의 경비부대에서 바로 그날을 맞았다, 8월 15일!

그러나 그날 그의 신분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된 일본군 병사였다. 도문역 근처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일본군은 소련으로 이송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교육했던 조선인 병사들을 모아 탈출계획을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조선인 병사가 전부 모였다. 그 순간 동족으로서 정말 뜨거운 환희를 맛보았다고 회상했다. 남두용과 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나흘 동안 170㎞를 걸어 귀향했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소련 끌려가기 직전 170㎞ 걸어 탈출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경원선 상의 38선 표지석 옆에 세워진 안내문.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경원선 상의 38선 표지석 옆에 세워진 안내문.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귀향한 남두용은 청진시의 나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5년 말 한반도 내부의 갈등은 찬탁 반탁으로 들끓었다. 그는 1946년 1월 동료 교사들과 함께 반탁시위를 일으켰고 인민위원회에 의해 바로 해산됐다. 남두용은 연금처분을 받았고 토지개혁까지 눈앞에 닥쳐오자 38선을 넘기로 결심했다.

1946년 1월 집을 나섰다. 걸어서 경성까지, 트럭을 얻어 타고 북청을 거쳐 원산까지 남하했다. 검문을 피하려고 원산과 성진(지금의 김책시)에서는 노숙을 했다. 원산에서 복계역(철원역 직전)까지만 운행하고 있던 경원선을, 위태롭게 화물칸 지붕에 앉아 이동했다. 그다음엔 다른 세 사람과 함께 걸었다. 얼어붙은 한탄강을 새벽에 건넜고, 얼마 가지 않아 미군 초소가 나타났다.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했다.

남두용은 한탄철교 남단을 일곱 번째 통과하면서 북위 38도가 38선이란 운명의 구획선이란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가 여섯 번이나 지나쳤던 이 지점을 통과하는 것은 이제 특별한 행위였다. 남으로 가면 타향의 외톨이고, 북에 남은 가족은 반동분자란 것이었다.

38선을 통과한 남두용은 동두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완전한 혈혈단신, 소위 ‘38따라지’가 됐다. 그래도 좋은 학력과 학연으로 생존의 실마리를 찾았다. 와세다대학 선배가 불하받아 경영하는 토건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회사에서 알게 된 서울 출신 여성과 1947년 결혼했다. 혼례에서 동창들이 들러리는 서주었으나 피붙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948년에는 모친이 월남했다. 집을 떠난 지 29일 만에 아들 집에 도착했다. 1947년 중반부터 38선 통행이 상당히 어려워졌으니 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두용은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한국전쟁 중 자원입대했다.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남두용은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한국전쟁 중 자원입대했다.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38따라지 생활도 버거운데 한국전쟁이 참극을 쏟아부었다.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이닥치자 남두용은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청년단 성동구 단장이었던 큰 처남이 체포됐고 소식은 두절됐다. 고등학생이었던 셋째 처남은 서울 수복 이틀 전에 친구들과 놀다가 끌려갔고 며칠 후 성동서 방공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마지막 남은 처남도 피난길에 화롯불 가스에 중독돼 사망했다. 졸지에 세 아들을 잃은 장모가 혼절하며 무너져 아들들을 따라갔다. 친가는 갈 수 없는 세상이 됐고 처가는 참혹하게 무너졌다.

남두용은 1950년 12월 정훈장교로 자원하여 입대했다. 유엔군이 북진하면 고향에 부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희망은 깨졌다. 1956년 제대했고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일생에서 가장 힘든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

그는 1960년 고등전형시험을 거쳐 상공부 과장으로 들어갔다. 퇴직 후를 대비하여 대학원도 다녔고 특허업무를 열심히 공부했다. 1975년 특허국 경력으로 변리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남한에서의 생활은 무난했다. 2012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두용은 러시아에 살고 있던 조카를 만났을 뿐, 다른 실향민과 마찬가지로 고향 땅 한번 밟아보지 못했다. 한탄철교 남단이 38도인 줄 알고 넘은 그 순간, 그는 운명의 선을 넘었다.

남두용은 은퇴 후에 본인의 일생을 회고하여 저서를 썼다. 보관해오던 개인 자료와 함께 박스에 담아 셋째 딸에게 맡겼다. 십년이 흘렀다. 그녀는 2020년 코로나19로 바깥출입을 삼가게 되면서 선친의 저서를 떠올렸다. 저서와 여러 자료를 읽어보고는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의 앨범까지 뒤져 사진을 찾아 넣고 선친의 행적을 지도에 그리기도 했다. 몇 달이나 걸려 정리한 끝에 『어느 실향민의 수기』라는 281쪽짜리 책자로 제작했다.

형제들에게 책을 돌린 다음엔 선친의 월남 여정을 하나하나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동반을 청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녀가 한탄철교 남단의 38선 표지를 보는 순간 목소리가 한 옥타브 이상 치솟았다. 마치 선친의 발자국 화석이라도 발견한 양 감격스러워했다. 저서에 쓰기를, 새벽에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넜고 잠시 후에 미군 헌병을 보았다고 한 바로 그곳이었으니. 철원의 백마고지역에서도 그랬고, 경원선 예정부지 팻말이 꽂힌 철원 민통선 부근에서도 그랬다.

옛 한탄철교 교각엔 총탄 자국 선명

청년 시절 남두용씨.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청년 시절 남두용씨. [사진 윤태옥·남명애·유윤영]

38선이 그어진 이후 월남한 사람들은 대략 150만 명으로 추정한다. 월북자도 30만~35만 정도로 추산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좌우의 경쟁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점령군이 들어앉은 서울과 평양은 좌우 세력의 핵이 되었고, 구심력과 원심력이 요동치며 철저하게 둘로 갈랐다. 북한 체제가 불편하면 월남해서 극렬한 반북한이 되었고, 남한에서 부대끼면 월북해서 강렬한 반남한이 되었다. 있을 수 있는 경쟁은 있을 수 없는 배타와 증오로 치달았고 결국 전쟁이란 용광로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그 폭발현장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남두용, 우연히 셋째 딸을 통해 접하게 된 그의 저서를 통해 나는 한 사람의 생존 분투를 조심스레 읽었다. 숨이 가빠왔다.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지만 그가 겪은 현실은 지금도 생생한 현실이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숨을 골라야 했다. 답사기의 여정은 이제 시작인데, 벌써 참으로 눈물겹다.

아 참, 남두용의 현대사를 꼼꼼하게 정리한 ‘작은 역사가’는 셋째 딸 명애씨. 본인이 사학도였던 것은 우연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부녀의 필연일 것 같다. 아버지의 저서를 정리하는 동안 얼마나 울었을지는 묻지 않았다. 옛 한탄철교의 교각에는 총탄 자국도 선명하게 남아 있으나, 경원선을 이설하면서 38선을 통과하는 철로와 침목은 이미 철거된 상태이다. 연천군은 옛 한탄철교의 활용방안과 문화재 등록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 현대사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지속해서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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