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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금리 인상 시기 놓쳐 인플레 확산땐 피해 더 커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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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호 03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0일 열린 한국은행 제72주년 기념식에서 “세계적인 물가상승 압력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0일 열린 한국은행 제72주년 기념식에서 “세계적인 물가상승 압력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파이터로서의 중앙은행 본연이 역할이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다시 매(통화 긴축)의 발톱을 드러냈다. 이 총재는 10일 한국은행 72주년 기념사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등으로 글로벌 물가 상승 압력이 상당 기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의 우려 그대로 최근 물가 상승세가 매섭다.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5.4% 올랐다. CPI 조사 대상 458개 품목 중 가격 상승률이 10% 이상인 품목만 93개(20.3%)에 달한다.

들썩이는 에너지·곡물 가격은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121.51달러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 국제 유가는 60% 급등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치솟은 곡물 가격 상승세도 장기화 우려가 나온다. 이 총재는 지난달 26일 “국제 유가가 안정되더라도 높은 곡물 가격이 상당 기간 지속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경제 주체들의 물가 상승 기대도 오르고 있다. 일반인들의 기대인플레이션율은 1월 2.6%에서 지난달 3.3%로 뛰었다. 기준금리 인상과 정부의 각종 대책에도 물가가 오를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다. 한은은 전날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를 통해 “최근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이 이미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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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재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를 웃돌고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정상화 속도와 강도를 높여가는 상황에선 더는 (한국은행이) 선제적으로 완화 정도(선제적 긴축)를 조정해 나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금리 인상으로 단기적으로는 취약계층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겠지만, 자칫 시기를 놓쳐 인플레이션이 더욱 확산된다면 그 피해는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에 따른 부작용이 있더라도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한은은 지난달에도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연 1.5→1.75%)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시장의 관심은 이제 금리 인상 폭과 횟수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는 올해 4차례(7·8·10·11월) 남은 상황이다. 금융권에서는 한은이 이 중 적어도 3차례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5월 CPI가 급등함에 따라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한은의 금리 인상 부담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10일(현지시간) 미 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5월 CPI는 지난해 동월보다 8.6% 급등했다. 전월(8.3%)보다 0.3%포인트 높은 것으로, 월가의 예상치(8.3%)를 웃도는 것이다. 전달 대비로는 1% 올랐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보다 6.0%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4월 상승률은 6.2%였고, 월가 예상치는 5.9%였다. 이처럼 물가가 고공행진을 지속함에 따라 Fed는 14~15일로 예정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이란 관측이다.

이렇게 되면 한은이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밟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종석 한은 부총재보는 9일 기자간담회에서 “빅스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면서도 “아직까지는 0.25%포인트씩 인상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빅스텝을 밟기에는 1분기 말 기준 1859조4000억원으로 불어난 가계부채 규모가 부담이라는 얘기다. 한은은 기준금리가 0.25%포인트 오를 때마다 차주 1인당 연 이자 부담이 16만1000원 늘어날 것으로 분석했다.

각국 중앙은행은 연일 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최근 3개월간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인상한 횟수가 최소 60회로 2000년 이후 가장 많았다”고 보도했다. Fed만 하더라도 3·5월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각각 0.25%포인트, 0.5%포인트 인상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0.75~1%로, Fed는 다음 주에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행(BOJ)과 함께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던 유럽중앙은행(ECB)도 물가에 백기를 들었다. ECB는 9일(현지시간)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오는 7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ECB는 “중기적으로 물가상승률 전망이 유지되거나 악화되면 9월에는 더 큰 폭의 인상이 적절해 보인다”며 빅스텝 가능성을 내비쳤다. ECB가 예고대로 7월 기준금리를 올리면 2011년 7월 이후 11년 만의 인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 11년간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유도했지만 지금은 인플레이션을 끌어내려야 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금리 인상의 남은 변수는 경기 둔화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시장 금리가 뛰면 가계는 이자 부담에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늦출 수 있다. 이 총재도 “중국의 경기 둔화,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가속화 등으로 글로벌 경기가 침체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와 향후 물가와 성장 간 상충 관계가 더욱 커지면서 통화정책 운영에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글로벌 긴축 부담 속에 이날 코스피가 주저앉으면서 삼성전자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날 삼성전자는 또 다시 52주 신저가(최근 1년 내 최저가)를 경신했다. 삼성전자는 10일 전날보다 2.15% 내린 6만3800원에 거래를 마쳤다. 4월 28일 장중 기록한 6만4500원 이후 6주 만에 52주 신저가다. 주가를 끌어내린 건 외국인들의 ‘팔자’ 행렬이었다. 외국인은 삼성전자 주식 595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외국인은 올해에만 삼성전자를 6조4230억원가량 팔아치웠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 센터장은 “지난 밤 인텔 경영진이 반도체 수요 부문 악화를 경고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주가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며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신흥국 시장에 대한 부정적 심리 영향까지 받으며 더 약세를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1.13%(29.57포인트) 내린 2595.87에 장을 마쳤다. 이재만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ECB의 금리 인상 예고 등 글로벌 긴축 우려 여파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매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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