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로 용도 구분한 둥근 버튼, 바우하우스 철학 담아

중앙선데이

입력 2022.06.11 00:02

업데이트 2022.06.11 00:05

지면보기

792호 26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브라운’ 계산기

모두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루프트한자 뮌헨행 비행기에 빈 좌석은 없었다. 해외여행이 정상화되고 있다는 뉴스와 눌러왔던 여행의 기대를 실감했다. 오랜만에 탄 비행기의 좌석과 내부 모습이 신선했다. 평소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비행기의 좌석배열과 창문, 수화물 선반 캐비닛의 디자인과 마감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타 볼 수 있는 여객기 기종이란 보잉과 에어버스 둘 중 하나인데, 루프트한자는 장거리 노선용으로 에어버스 A350-900을 사용한다.

비행기 실내 인테리어는 이른바 유럽 스타일이라 할만 했다. 간결하고 단단한 느낌이다. 전체적인 기내 색깔은 흰색이지만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아이보리 톤으로 벽과 천장 색깔을 달리한 점이 눈에 띈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머리 위 수화물 캐비닛은 흰색과 회색의 경계색을 써서 묵직한 안정감을 준다.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날려버린 흰색의 역할은 효과적이다. 양쪽으로 이어진 캐비닛 사이로 천장이 높게 보인다. 평소 밀실처럼 답답했던 비행기 실내가 유난히 커 보였다. 얼핏 똑같아 보이는 흰색은 벽과 천장의 기능과 형태를 고려해 엄격하게 구분됐다. 흰색이 다 같은 흰색이 아니고, 플라스틱이라 해서 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재료의 물성을 파악한 적절한 색의 조화가 감정을 안정시킨다. 비즈니스 클래스의 시트는 산업용 기기 같은 묵직한 회색으로 마감했다. 마치 과거 소니 제품에서 느껴지던 독특한 재질감으로 플라스틱 커버조차 금속의 일부 같은 단단함이 느껴진다.

별 것 아닌 듯한 비행기 인테리어 디자인도 들여다보면 끝이 없다. 벽과 천장, 좌석의 배치 같은 기능과 형태의 조합은 디자인 관점으로 조화시키기 어렵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수 백 가지는 넘을 것이고 선택한 재료의 등급까지 따지면 경우의 수는 무한대로 늘어난다. 그러고 보니 루프트한자는 예전부터 디자이너 막스 빌과 협업을 펼쳐왔다.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그 현재의 모습이다.

비행기에서 비롯된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환기는 급기야 막스 빌이 세운 ‘울름 조형대학’까지 찾게 했다. 이미 없어진 학교에는 빈 건물만 남았다. 건물 입구엔 막스 빌이 직접 쓴 사인이 보존돼있다. 한때 이곳이 실재했던 현대 디자인의 산실이었다는 게 실감났다. 현재 학교의 일부가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난 역사만을 정리해 열거한 전시물들은 평면적이고, 운영도 신경쓰지 않는 듯 사람들의 발길도 드물다. 울름 조형대학의 신화 때문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으리란 기대는 싸악 사라져버렸다.

디자이너 디터 람스.

디자이너 디터 람스.

그렇다고 울름 조형대학의 역할까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막스 빌의 간결하고 허세를 걷어버린 실용의 디자인 철학은 계속 이어진다. 현재 가장 아름다운 스마트 기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애플의 원류를 따지면 울름 조형대학과 맞닿는다.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애플이 통째로 훔쳤던 건 이 학교 출신의 디자이너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와 디터 람스가 만들어낸 브라운 시절의 업적들이 아니던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곳들 중 하나가 디터 람스 디자인을 테마로 한 카페와 공간들이다. 세련되고 뭔가 있어 보인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이베이 경매를 통해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아이템 가운데 디터 람스의 것들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기능적 본질에 충실한, 이 간결한 아름다움을 쉽게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 디터 람스 열풍이 우리에도 불게 된 연유는 사실 애플의 성공에서 비롯됐다. 그 이전에 디터 람스를 주목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국 그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본 스티브 잡스가 대단하다는 역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ET-55

ET-55

디터 람스 디자인은 독일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박물관 굿즈 숍에선 그가 만든 계산기가 지금도 팔리고 있다. 1987년 처음 만들어진 ‘ET-55’(사진) 기종이다. 지금 보면 턱 없이 작은 액정화면에 원형 버튼이 배열된 평범한 디자인인데, 왜 아직도 이 디자인을 버리지 못하는 지 궁금해진다. 스마트 기기의 수용과 쓰임이 많은 우리와 달리 독일 사람들은 여전히 계산기를 쓴다. 가게나 카페에서 당연한 듯 주머니에서 계산기를 꺼낸다. 그것도 하나같이 ‘브라운(BRAUN)’ 검정색 계산기란 걸 보고 놀랐다.

브라운 계산기는 다시 생산되고 있었다. 뒷면의 ‘메이드 인 차이나’ 표시만 없으면 오리지널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계산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취향의 선택이 늘어났다고 봐야 할 게다.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아이폰에는 브라운 계산기와 똑같은 화면이 뜨는 앱을 썼다. 숫자가 나오는 화면이 커진 것만 빼면 버튼 색깔과 배열의 싱크로율은 99%다. 스티브 잡스가 대체불가의 디자인이란 의미로 도용한 게 브라운 계산기다.

본질에 충실한 기능만으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지 브라운 계산기는 보여준다. 명도 높은 플라스틱 커버의 검정색은 짙은 광택의 둥근 버튼들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숫자는 검정, 연산기호는 갈색, 결과를 내는 엔터키는 노란색이어서 색깔만으로 버튼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다. 버튼의 형태가 둥근 형태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평소 쓰던 일본제 계산기의 각진 실리콘 재질 버튼과 비교해보라. 주변부를 눌러도 고르게 힘이 전달되는 반구의 기능성 때문에 채택됐다는 점을 알게 된다. 별것 아닌 작은 계산기에도 본질의 환기를 주문하는 바우하우스의 전통은 그대로 녹아있다. ‘독일스러움’이란 무한 신뢰가 계산기에서도 풍기는 이유를 여기서 찾게 된다.

독일에 들른 김에 오리지널 브라운 계산기를 구하고 싶었지만 이내 쓸데없는 기대라는 걸 알아챘다. 독일이라고 해서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유혹을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리지널을 결국 손에 넣게 됐다. 브라운 제품에 열광하는 친구를 알기 때문이다. 계산기 하나만으로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풀어내는 신공이 놀랍다. 이래서 좋은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한다. 물건과 사람이 동시에 오기 때문이다. 디터 람스의 계산기는 앞으로 좋은 디자인을 환기시키는 부적 같은 용도로 쓸 작정이다.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