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한국어 마을’ 전 촌장 로스 킹 교수
테이블 위 와인 잔이 엎어지자 주변에 있던 한국인들은 저마다 ‘웁스(whoops)’ ‘오 마이 갓(Oh My God!)’을 외쳤다. 이때 누군가 “아이쿠, 저런.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캐나다 BC(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는 미국인 로스 킹(61) 교수다.
한국인보다 더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어휘력을 구사하는 킹 교수의 본업은 대학교수지만, 1999년부터 2014년까지 15년 간 매해 여름방학이면 두 달 간 ‘부캐’인 ‘숲속의 호수 촌장’으로 활동했다. 제자에게 촌장 자리를 물려준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전 촌장’ 역할을 하며 여름방학을 보낸다.
“한동안 교수로서 연구 업적이 별로 없었다.(웃음) 교수들은 방학 때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는 매번 ‘숲속의 호수’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한국어로 책이나 논문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걸 몇 사람이나 읽겠나.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면서 미래의 ‘친한파’를 준비하는 일이 내게는 더 소중하다.”
한국 이름 ID카드 없으면 밥도 못 먹어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숲속의 호수’는 비영리단체 ‘콘코디아 랭귀지 빌리지’가 운영하는 14개 외국어 마을 프로그램 중 한국어 마을의 이름이다. 한국의 ‘영어 마을(캠프)’과 비슷한 곳으로 여름방학 동안 2주 또는 4주 프로그램을 통해 미 전역과 해외에서 온 8세~18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역사를 가르친다.
“간판·안내문까지 모두 한국어로 쓰인 공간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K팝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한자도 배운다. 점심·저녁시간에는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김치찌개 더 주세요’ ‘삼계탕 맛있어요’ ‘김치가 매워요’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만두·김밥 등을 만들면서 식재료 이름도 배운다. 작은 기념품점에선 원화를 사용하고, 한국 이름으로 된 ID카드(신분증)도 발급받는데, 이 카드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웃음)
한 회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70명의 수강생과 30명의 스태프가 머문다. 요리사·안전요원 등을 빼면 선생 역할을 하는 스태프 1명 당 학생 4명을 담당하는 꼴이라 밀착 관리가 가능하다. 스태프의 자격 요건을 묻자 킹 교수는 최우선 조건이 ‘끼’라고 답했다.
“나이 제한은 없는데 24시간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언어·춤·노래·궁도·태권도·전통악기 등을 가르치고 소통해야하니까 끼와 재주가 있는 사람이 좋다. 꼭 한국인이 아니어도 된다. 오히려 외국인이면서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아이들에게 ‘나도 저렇게 한국어를 잘하고 싶다’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킹 교수는 K팝 등 한류 열풍이 불면서 7~8년 전부터 수강생이 확실히 급증했다고 했다.
“아이들이 K팝에 완전 미쳤다.(웃음) 이전에는 대부분 한국어 까막눈으로 들어오는데, 요즘은 K팝·K드라마 덕분에 독학으로 인사, 자기소개, 간단한 감정 표현 정도는 깨치고 들어오더라. 한국어 시작 레벨이 높아진 거다. 관심 있는 스타나 드라마 속 이름 덕분에 한국어 이름 짓기도 훨씬 다양해졌다. 몇 년 간 꾸준히 숲속의 호수를 다니고 스태프로도 활동했던 외국인 여학생이 지금 UCLA에서 한국 문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데 한국어 이름이 ‘효리’다.”(웃음)
킹 교수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속담과 함께 바로 지금이 정말 중요한 때라고 거듭 주장했다.
“언어 학습 시 호기심이 풍부한 15~24살이 골든타임이다. 이때 제대로 된 학습 기회를 줘야 그 나라의 문화·역사·정치·경제 이슈까지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가 언어 마을을 운영하는 목적도 한국어 단어 몇 개 외우게 하느냐가 아니다. 평생 한국어 학습자가 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게 주 목적이다.”
미네소타주 근처에 살았던 킹 교수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콘코디아 랭귀지 빌리지’에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주 전공인 한국어 외에도 독일·스페인·러시아어 등 8개 국어에 능통하다. 하버드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이유도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일본어와 중국어 사이에서 전공을 고민하는 그에게 지도교수가 한국어를 권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두 번의 방학 동안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에서 1년 간 교환학생으로 지냈다.
“당시 서울에선 대학생들이 ‘미국놈들은 물러가라’고 매일 시위를 했죠. 딱히 거리구경을 다니기도 뭐해서 수영장에 다녔는데, 그때 경비 아저씨랑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때 한국어가 정말 많이 늘었다.”(웃음)
교실을 벗어나 자연과 일상에서 놀고, 먹고, 즐기면서 언어를 체험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학습방법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셈이다. ‘숲속의 호수’ 교육 프로그램이 자연과 일상을 기본으로 체험형+몰입형으로 펼쳐지는 이유다. 하버드에서 동급생 김효신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한국어 교수가 된 것도 모두 한국어로 시작된 평생의 인연이다. 킹 교수는 “짧은 경험이라도 쌓이면 평생의 인연이 될 수 있다”며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 중요성과 한국 정부·기업의 관심을 부탁했다.
“언어의 확산은 장기적인 인프라를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K팝 때문에 한국어에 대한 갈망이 생긴 아이들을 잘 잡아둬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오랫동안 인프라를 잘 구축해온 일본에 뺏긴다. 1970년대 일본 정부와 기업은 1년 간 1000만 달러 이상을 북미 어학 교육 인프라 구축에 쏟았다. 덕분에 지금 일본 경제가 휘청거려도 미국 내 일본학은 기반이 탄탄하다. 반면 한국 정부와 기업은 50년 전 일본 투자액의 5분의 1도 투자를 안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와 한국어 교육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용 기숙사 없어 더부살이 안타까워
킹 교수는 K팝의 영향으로 미국과 유럽 내 한국어학과가 여럿 생긴 것은 맞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인원이 반 이상 이탈한다고 했다. 확실한 전공 프로그램을 만들어둔 곳이 많지 않고, 전공학과를 둔 일류대학들은 학비가 비싸서 장학금이 없으면 한국어 공부를 계속 하기가 쉽지 않단다. 이때 한국 정부와 기업이 투자해서 장학금 제도 같은 걸 많이 만들어두면 한국어 교육 기회는 훨씬 넓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게 킹 교수의 생각이다.
“‘숲속의 호수’ 4주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미 전역 고등학교에서 1년 동안 이수해야 하는 학점 중 180시간에 해당하는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K팝 때문에 한국어를 너무 배우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라 매년 수강생이 몰리지만 문제는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부족하다. 한국어 마을은 현재 자체 기숙사가 없어서 러시아 마을의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선 유일하게 3년 전 핸드백 업체 ‘시몬느’ 박은관 회장이 500만 달러를 기부해주셔서 겨우 식당과 교육·사무 공간을 지을 수 있었다. 기숙사를 지으려면 그 두 배가 필요한데 현재로선 자금 조달 방법이 없다.”
한국어 마을 전용 기숙사가 생기면 러시아 마을 일정 눈치 안 보고 아이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여름방학 뿐 아니라 가을·겨울에도 상시로 프로그램을 열 수 있다.
“한국에선 K팝이 뜬다고 한류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언제까지 ‘두 유 노우 BTS?’라는 말로 문화 자부심을 채울 수 있을까. K팝은 미끼여야 한다. 더 심도 깊은 한국학을 배워보라고 신호를 주는 미끼. K팝 기업들도 외국인에게 한국어에 대한 갈망을 심어준 당사자들이니 아이들이 계속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투자도 좀 했으면 좋겠다. 가져가지만 말고. 하이브나 SM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한 기부를 했다고 하면 아이들의 충성심은 얼마나 더 높아질까. BTS 장학금이 있다면 그걸 받으려고 얼마나 많은 외국인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고 또 열심히 노력할까. 상상만 해도 멋진 풍경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