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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죽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 4050은 왜 김훈에 끌리나[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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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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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문학동네

소설도 결국은 세대의 장르다. MZ세대와 86세대는 경험치와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소설을 읽더라도 웃고 웃는 포인트가 연령대에 따라 갈릴 수 있다는 얘기다.

작가 김훈이 16년 만에 내놓은 단편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는 서점에 깔리자마자 그의 이름값을 입증하고 있다. 교보·알라딘 등 주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훌쩍 진입했다. 이런 통계가 86세대의 구매만으로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문장가로서, 당대에 대한 비판자로서 그간 쌓아온 이미지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밖에 해석하기 어렵다.

소설가 김훈.전민규 기자

소설가 김훈.전민규 기자

그렇더라도 김훈에 대한 중장년층의 편애는 또렷하다. 연령대별 구매자 분포 자료를 제공하는 알라딘에 따르면, 독서와 거리가 멀다고 일반화되는 40~50대 남성 구매자 비율이 같은 연령대 여성 구매자 비율에 맞먹는다. 2030 여성 독자들이 먹여 살리는 대부분의 국내외 소설들과 달리 김훈 소설은 중년 남성들이 사본다는 얘기다.

 기자를 포함해 4050은, 특히 남성 독자들은 왜 김훈의 소설에 끌리나. 평단의 지적처럼 86세대와 동년배 혹은 86세대가 직장 상사나 학교 선배로 마주쳤을 60대나 70대의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책에 실린 7편의 단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 연령대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요컨대 김훈 소설은 '우리'들의 사정을 대변한다.

70대 이혼남의 속사정

 '대장 내시경 검사'는 어쩐지 실물의 김훈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소설 내용이 작가의 실제 상황과 겹친다는 얘기가 아니다. 70대 김윤수는 이혼남이다. 그런데 대장 내시경 검사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70세 이상은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수면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다.

그는 왜 이혼했나.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의 다툼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았고, 무의미한 것들이 쌓여 무의미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125쪽) 김윤수는 전처에 대한 자신의 지겨움으로, 전처가 자신에게 느꼈을 법한 지겨움을 이해할 수 있노라고 자조한다. 결혼은 김윤수 부부의 주례를 섰던 S 교수에 따르면 연명을 위한 물적 토대와, 사랑이 아닌 연민의 힘이 있어야 성립 가능한 관계다. 김윤수는 그러나 자신들은 "날마다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일을 지속시킬 만큼 '연민의 힘'을 길러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141쪽)

 이런 김윤수의 궁리 끝에 나오는 소설 문장이 이색적이다. "이 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소설의 어조인가. 독자에 대한 통고다. 작가 김훈이 소설 밖으로 뛰쳐나와 행하는 발화 같은 느낌이다. 4050은 소설이 자신들의 심경을 대변한다고 해서 손뼉 치며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대부분의 사태에 심드렁해진 상태가 아닐까. 김훈은 김윤수에게 닥친 사태를 담담히 그려낼 뿐이다. 그런 김훈의 소설을 4050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대장 내시경 검사'라는 제목부터가 언어 예술인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활 세계의 언어다.

유한성 극복하는 구원의 문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는 메시지나 소재로나 요즘의 김훈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4050이나 그 이상 세대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거친 해풍에 시달리는 서해안 바닷가 호스피스 수녀원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 인간의 죄와 신의 용서 같은 굵직한 문제들을 건드렸다.

소설 안에서 이런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삶은 죽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 죽음은 치유 불가능한 몸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구원의 문이다." (243쪽) 이런 문장이 김훈의 창안인지, 소설이 소재를 구한 실존했던 사제의 생전 문장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거나 생각을 강요하는 문장이다. 이번에도 김훈 소설을 읽는 일은 그의 문장을 읽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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