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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까지 못가” “교수도 못구해”…현장서 나온 ‘반도체 인력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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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사wls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사wls 대통령실]

“앞으로 10년간 최소 3만 명이 부족하다는 게 공통된 진단입니다. 일단 전공자 찾기가 어렵지만 ‘재목’으로 키우기는 더 어려워요. 연봉 1000만원 더 주고, 안 주고 문제가 아니라 지방 근무를 기피해서입니다.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화성·기흥, SK하이닉스는 이천, DB하이텍은 부천에 공장이 있는데도 인력 확보가 만만치 않아요.”

앞으로 10년간 3만 명 부족한데 

9일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국내 반도체 대기업 관계자가 전한 말이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행정 부처에 특단의 노력을 주문하면서 관련 업계는 반색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대학 정원 확대만으로 ‘인재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학생뿐 아니라 교수진과 교육 장비 등을 늘려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먼저 인력난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앞으로 10년간 3만여 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만 보더라도 한 해 수천 명의 인력이 필요하지만 전국 약 20개 반도체학과(계약학과 포함) 졸업생은 650명 수준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업계에서 필요한 인력과 대비해 대학에서 배출되는 전공자는 10분의 1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수요 증가로 산업 규모가 커지고, 삼성전자가 평택캠퍼스 제3공장(P3) 양산을 앞두는 등 기업별 사업이 점점 확장되는 상황에서 인력 풀은 그대로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최근 10여 년간 급성장한 플랫폼·게임 업체 등과 ‘구인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 역시 반도체 업체들의 고민이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처우와 복지가 좋아 방진복을 입고, 팹(반도체공장)에서 3교대로 일했지만 최근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같은 기업들이 연봉을 대폭 인상하면서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마나 우수 인재는 판교로  

대입 트렌드가 바뀌면서 이른바 ‘인력의 질’도 문제다. 최근 20년 가까이 실력이 뛰어난 입시생들이 의·치의학 계통을 선호하면서 현장에서는 예전과 비교해 기술 인력의 실력이 예전보다 떨어진다는 말이 나온다.

업계는 윤석열 정부의 대학 정원 규제 완화가 인력난 해소의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도 단기간에 효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업계 관계자는 “학생과 함께 교수진을 확대하고, 낙후한 교육 장비와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며 “요즘은 대학에서 배우는 기술 수준이 기업과 너무 동떨어진 상태”라고 지적했다.

현장으로 갈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중견·중소 반도체 업계에선 “기껏 (대졸 전공자를) 뽑아놨지만 반도체 분야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모르겠다”며 부정적인 호소가 나온다. 업계에서도 대책을 마련 중이다. 반도체산업협회는 올해 말 중견‧중소 반도체 기업 채용 연계 시스템을 오픈할 예정이다. 협회가 구직자를 검증하고, 업체는 적합한 인재를 채용하는 방식이다.

기업들도 자구책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반도체 연구소를,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R&D 조직을 두고 있다. DB하이텍은 직원이 경력사원을 소개하면 그에 맞게 보상해주는 추천제를 도입했다.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해 우수 인재를 영입하려는 시도다.

서울의 한 대학교 취업게시판에서 채용정보를 살펴보는 대학생 모습. [뉴스1]

서울의 한 대학교 취업게시판에서 채용정보를 살펴보는 대학생 모습. [뉴스1]

계약학과는 교수진 구성 등에서 ‘한계’

반도체에 특화한 전문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기업과 대학이 손잡고 계약학과를 속속 설립하고 있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반도체 계약학과 학사과정이 있는 대학은 성균관대·연세대·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4곳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내년 10개 대학으로 늘어나며 이 대학들의 내년 3월 신입생은 510명이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학비 전액을 지원하고 졸업생은 결격 사유가 없으면 입사시키는 형태다. 업체들은 대학에 필요한 실습 장비와 실습비도 지원한다. 박재근 학회장은 “학부에서는 반도체 소자 제조 공정, 회로 설계 방법 등 기초적 내용을 배운다”며 “졸업생은 기업 생산시설에서 일할 수 있고, 대학원을 졸업하면 연구개발(R&D) 등에 투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하지만 반도체 계약학과는 통상 4~5년 단위로 대학과 재계약을 하기 때문에 지속성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2006년 운영을 시작한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다른 대학들은 최근 운영을 시작해 초기 단계다. 이렇다 보니 교수를 채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근본적 인력 양성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무엇보다 유능한 교수진 확보가 어렵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고, 처우도 좋지 않아 지원을 꺼리기 때문이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학생 수를 늘려도 교수를 뽑지 않으면 질 좋은 강의가 나올 수 없다”며 “반도체 관련 연구비를 늘려 반도체 연구 교수를 확보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형 다이슨대학 설립” 목소리도  

기업의 ‘맞춤형 고급두뇌 확보’ 방안으로 기업부설대학 설립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업부설대학은 기업이 학생 선발과 교수진 구성, 커리큘럼 등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수도권 규제 논란 등을 피해 가는 ‘우회로’이면서, 자체적으로 필요한 인재 육성에서도 ‘속도’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김상길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전략기획본부장은 “기업기술촉진법 제정을 통해 기업부설대학 설립 길을 터주면 삼성전자는 ‘삼성반도체대학’을, 현대자동차는 ‘미래모빌리티대학’을 운영할 수 있다”며 “영국의 다이슨공과대학처럼 ‘산업인재 양성소’로서 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이슨대학은 영국의 유명 가전업체인 다이슨이 2017년 설립했다. 신입생 선발·교육·운영에서 독자적인 자율성을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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