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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제왕적 대통령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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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제헌헌법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 국민은 공화국이라는 개념에도, 민주주의라는 개념에도 익숙치 않았다. 당연히 껍질만 삼권분립, 민주주의 헌법은 그 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사사오입개헌 등 세 차례의 개헌을 거치며 누더기 헌법으로 변했다. 1987년 현재의 헌법으로 개정되기까지 모두 아홉 차례 개헌을 겪었다. 아직도 우리는 많은 면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눈부신 국가발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서구에서는 17~18세기에 계몽주의운동에 의해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지성, 자유, 기본인권에 대한 토론이 심화되었고, 이러한 시민적 토론을 거치면서 혁명 또는 개혁에 의해 국가와 시민의 계약인 헌법이 정립되며 오늘날 국가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 독일, 프랑스식 모델 등을 흔히 얘기한다. 그러나 그런 모델을 도입하면 그런 나라들 모습처럼 되기보다 특이한 한국적 변종을 낳게 된다.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쌓아온 역사와 전통, 사회구성원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인식과 행동양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상 대통령 권한은 제한적
제왕적 대통령 비판 두려워 말고
실질적 자문그룹 두고 경청하기를
집단지성에 의한 국정운영 바람직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태리의 삼색기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삼색기는 인권 억압과 탄압에 대한 분노,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 진리를 뜻한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국기는 오늘날 국가를 이룬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유니온 잭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성조기는 독립을 선언한 13개주를 희고 붉은 가로선으로, 새로운 주들이 추가되면서 왼쪽 위 파란바탕에 50개의 별들을 새겨 넣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과 4괘’ 성리학 사상을 담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헌법체계는 서구와 거의 같으나 국기는 그와 크게 다른 가치, 사상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 국기가 잘못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를 바로 성찰하며 정치와 정책을 하자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들 하지만 실상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가 헌법을 바꾼다고 제왕적 대통령이 없어질까? 내각제로 바뀌면 제왕적 총리들이 많이 출현할 수도 있다. 참모들과 주위에서 대통령을 왕처럼 모시려 하면 제왕적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뀌고 있긴 하지만 아직 한국 가정에서의 부자관계,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학교에서의 사제지간이 서양의 그 것과 꼭 같지는 않다. 국가경영만 다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민은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고 때로 대통령이 모든 일에 나서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것이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독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꼭 나쁠 것도 없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안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5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국내외적으로 대전환기에 처한 이 시대의 과제들에 제대로 방향을 세우고 국가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실이 국정의 방향을 잡고 끌어갈 수밖에 없다. 장관은 소관부처의 일과 정책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국무회의가 국정의 토론장이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책임총리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헌법에는 없는 개념이다. 대통령실을 굳이 슬림화 하거나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하면 왜곡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헌법이 정한 권한 내에서 국정을 제대로 끌고가고 성과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제왕도 명군(明君)이 있고, 암군(暗君)이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둘 사이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집현(集賢)과 경청(傾聽)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민들에게 봉사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이번 정부 내각과 대통령실에는 유능하고 실력 있는 인사들이 많이 기용되었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관료들의 경험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각 분야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그룹을 두고 대통령이 수시로 이들과 토론하며 정보를 축적하고 사실을 검증하며 국정 방향에 대한 판단을 해 나가길 권하고 싶다. 이 자문그룹은 과거의 형식적, 이벤트 용 자문그룹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경제, 외교안보, 산업기술, 교육문화 등 각 분야에 통찰력을 갖춘 6~7인 정도의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숫자가 너무 많으면 형식적 자문회의로 흐르기 쉽다. 대통령이 자문그룹을 수시로 만나고 이들과 긴밀히 토론하며 정책을 점검해야 참모와 관료들도 긴장해 더 일을 잘하게 된다. 대통령이 거의 의무적으로, 수시로 이 자문회의의 의견을 듣는 것을 국정 관행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이 것이 ‘반지성주의’를 피하는 유효한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지성은 독자적 판단보다 오류를 줄이고 그에 기반한 국가운영이 우월한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오늘날처럼 급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