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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대구 미분양 급증 뒤 강남 27억 떨어졌는데...주택시장 2008년 닮아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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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안장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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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원의 부동산 노트] 불안감 커지는 부동산 시장

안장원 부동산선임기자

안장원 부동산선임기자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지난달 말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인으로 첫 남우주연상을 받은 ‘칸의 남자’ 송강호가 영화 ‘관상’에서 남긴 말이다.

정권교체, 고물가, 미분양 증가 #2008년 금융위기 때와 판박이 #집값 폭락 재연될까 불안 커져 #"공포를 이겨야 시장 보인다"

그는 2013년 10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이 찾은 영화 ‘관상’에 출연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잃은 비운의 천재적인 관상가 김내경 역을 맡았다. 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이 시대적 배경이었다. 김내경은 왕이 될 상을 제대로 보면서 정작 자식의 관상에 어두웠다.

 경기 불안 등으로 주택 매매 거래량이 크게 줄었지만 집값은 쉽게 꺾이지 않고 지역에 따라 강세와 약세가 교차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용산 대통령 집무실과 인근 아파트 단지. 뉴스1

경기 불안 등으로 주택 매매 거래량이 크게 줄었지만 집값은 쉽게 꺾이지 않고 지역에 따라 강세와 약세가 교차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용산 대통령 집무실과 인근 아파트 단지. 뉴스1

계유정난 성공 이후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가 찾아왔을 때 김내경은 회한 가득한 말을 던졌다. “난 사람의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

송강호의 칸 수상 소식과 함께 이 대사가 떠오르는 건 부동산을 담당해 주택시장의 ‘파도’를 지켜본 기자로서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다시 '바람'이 궁금해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동안 격랑을 일으킨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게 아닐까. 과거 바람이 급변했을 때와 비슷한 냄새가 느껴져서 하는 얘기다.

2008년에도 건설비 등 물가 몸살 

금융위기 충격이 휩쓸고 간 2008년이 14년 만에 재연되는 모양새다. 정치에서 시작한 닮은꼴이 경제로 옮겨가며 주택시장에 드러나는 윤곽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2008년은 정치적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해다. 노무현 정부에 이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여당과 야당이 뒤바뀌었다. 이명박 정부는 대대적인 주택공급 확대를 추진하며 노무현 정부의 고강도 주택시장 규제를 풀었다. 대표적으로 양도세·종부세 등 세제를 손보고 분양가상한제·재건축부담금 등 재건축 관련 규제를 완화했다.

이명박 정부 임기 첫해의 주요 정책 일지를 보자. ^6월 일시적 2주택자 중복보유 허용 기간 완화(1→2년) ^8월 분양가상한제 개선,연간 50만가구(수도권 30만가구) 주택공급 계획 ^12월 양도세 다주택자 중과 한시적(2년간) 배제, 종부세·재산세 완화 관련 법 개정 등이다.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이명박 정부 정책의 판박이로 진행되고 있다. 취임일인 지난달 10일부터 양도세 다주택자 중과를 1년간 배제하고 일시적 2주택자 비과세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올해 1주택자 종부세·재산세를 지난해 공시가격으로 매기고 공정시장가액 비율 조정으로 종부세를 2020년 수준으로 인하하기로 했다. 이달 분양가상한제 개선안도 마련키로 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새 정부 출범 100일 이내에 주택공급 로드맵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윤 대통령은 공약에서 5년간 주택 25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취임 이후 경제 먹구름이 몰려온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다가오며 물가가 치솟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4.7%로 전년(2.5%)의 두 배 수준으로 뛰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7.5%) 이후 최고였다. 올해 들어 5월까지 상승률이 이미 4.3%로 2008년 이후 가장 높다.

고물가는 고분양가를 자극한다. 2008년 주거용 건물 건설공사비의 상승률이 연간 기준으로 17%였는데 올해도 13%가 넘는 상승률을 나타내고 있다. 공사비 상승은 원가로 분양가를 매기는 분양가상한제의 기본형 건축비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공사비를 반영한 기본형 건축비를 매년 3월과 9월 두 차례 고시한다. 2008년엔 철근 가격 급등을 반영해 7월 비정기 고시하기까지 했다. 다시 지난해 7월 “고강도 철근 가격이 33% 상승했다”며 비정기 고시한 데 이어 올해도 비정기 고시가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기본형 건축비가 10%가량 오르면 분양가상한제에 따른 분양가가 3.3㎡당 100만원 이상 오르는 압력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고물가는 고금리를 동반한다. 물가를 잡기 위한 대응으로 당국은 2008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기준금리를 연이어 인상했다. 올해 들어 벌써 3차례다. 0.5%이던 기준금리가 지난해 8월 0.75%로 올랐다가 다시 9개월 새 2배가 넘는 1.75%로 뛰었다. 올해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 5월 기준금리 인상을 반영하지 않은 예금은행의 신규 취급액 기준 평균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4월 3.9%다. 조만간 4%대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2%대였다.

서울 아파트 거래 3개월 연속 역대 최저   

주택시장 파열음이 분양시장부터 난다. 미분양이다. 2007년 말 전국적으로 11만여 가구이던 미분양이 2008년 말 역대 최대인 16만여 가구로 급증했다. 올해 전국적으로는 2008년 수준에 훨씬 못 미치지만 일부 지역 증가세가 가파르다. 2008년과 마찬가지로 서울과 대구가 눈에 확 띈다. 지난 4월 기준으로 서울 미분양이 360가구로 지난해 말(54가구)의 6배가 넘는다. 지난해 7월 분양을 시작한 서울 동대문구 A아파트는 최초 36대 1의 경쟁률에도 절반 가까이 미분양한 데 이어 지난달까지 8차례나 추가 모집을 했지만 15%가 남아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대구의 미분양도 같은 기간 1900여 가구에서 6800여 가구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 대구에 분양한 9개 단지 중 8곳이 1순위에서 미달했다.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며 청약경쟁이 치열했던 수성구 내 3개 단지도 1순위에서 대거 미달하는 쓴맛을 봤다.

2008년 1년새 서울 미분양이 5배, 대구 2배 정도 늘었다. 이월무 미드미네트웍스 대표는 “올해 분양 물량이 적은 데도 미분양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주택 수요가 위축됐다는 뜻”이라며 "경쟁률이 높은 단지에서도 당첨자가 재당첨 제한 불이익을 감수하고 선뜻 계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기존 주택 매매 거래시장에도 찬바람이 분다. 2008년처럼 서울 아파트 거래량이 전년에 비해 반토막났다. 지난해 월간 2000건 이상을 상회하며 최고 5000건 넘게 늘었으나 지난해 12월부터 1000건대로 줄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연속 2006년 통계를 작성한 이래 역대 최저치다. 5월 이후에도 거래량이 별로 늘지 않았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거래량은 주택시장 지표로 거래량이 줄면 시장 온도가 떨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기류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 말 집값 상승세가 꺾이고 거래량이 줄어든 것은 금리 인상과 대통령 선거 등에 따라 매수세가 관망세로 돌아섰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윤 대통령이 당선되면 규제 완화 기대감으로 시장이 살아날 것으로 봤다. 하지만 경제 복병을 만났다. 갈수록 경제 전망이 악화하면서 2008년 시작돼 201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집값 하락의 악몽이 재연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퍼지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KB국민은행 통계를 보면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8월 정점을 찍은 서울 아파트값은 일부 반짝 회복이 있기는 했지만 2014년 7월까지 6년 가까이 약세를 이어갔다. 이 기간 통계상으로 8.6% 하락했지만 단지에 따라 ‘폭락’ 수준을 경험했다. 2008년 57억원으로 최고였던 강남구 삼성동 아이파크 전용 195㎡의 실거래가가 3년 뒤 30억원까지 떨어졌다. 강북에서도 노원구 상계동 주공 전용 84㎡가 2008년 5억원 넘게 올랐다가 2014년 2월 3억1000만원으로 내렸다.

지금도 통계 수치가 '플러스'이지만 서울 송파·마포 등 인기지역에서도 2억~3억원씩 하락한 거래가 나오고 있다.

주택 수요의 척도 세대수 증가세     

하지만 2008년과 다른 점도 많다. 2008년에 비해 경제 충격이 덜하고 주택시장도 약하지 않다. 주택 거래량이 급감한 데도 집값이 쉽게 내려가지 않는 게 방증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직은 경제가 금융위기에 버금갈 수준까지 나빠지지 않았다. 미분양도 당시의 10분의 1 수준이다. 주택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30대 수요가 여전하고 외지인의 서울 수요도 줄지 않았다. 거주 단위로 주택 수요 측도의 하나인 세대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서울 주민등록 세대수가 지난해 말 대비 3만4000여 세대 늘었다. 5개월 새 지난해 1년간 증가한 8000여 세대의 4배다. 한해 2% 넘게 늘어난 2020년과 비슷한 추세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강남은 이미 약세로 돌아서 시장에 균열이 생겼지만, 지금은 강남이 잘 버티고 있다. 주택공급이 더뎌지는 상황에서 전셋값도 변수다.

앞으로 구체화할 주택공급 로드맵 등 규제 완화가 주택시장 심리를 떠받치는 부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규제 완화 정도에 따라 집값 상승을 부채질할 것이다. 주택공급 확대만이 아니라 부동산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규제 완화도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의 수순을 밟는다면 조정대상지역 등 규제지역 해제, 지방 미분양 해소 방안 등이 다음 차례다.

“탐욕을 줄이고 공포를 이길 때 시장이 보인다.” 부동산업계에서 재야의 고수로 꼽히는 부동산 칼럼니스트 ‘아기곰’(필명)이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