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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왜군 7만 물리친 함양 백성, 그들은 왜 잊혀져갔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경남 함양 황석산성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경남 함양의 아나키스트들을 취재하다 이곳 황석산성에서 정유재란의 승패를 가늠할만한 결정적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이 전투는 정유재란 때 한양이 왜군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은 이유에 해당할 만큼 중요했다. 임진왜란 때는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에 패해 선조가 한양을 비우고 의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정유재란 때는 어째서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지 못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수천명 항전
임진왜란·정유재란 종식 이끌어

이순신, 명량해전 대비 시간 벌어
참패한 일본, 전투상황 왜곡·조작

나라 지키려 목숨을 던진 민초들
역사의 주인공으로 되살아나야

왜군은 왜 한양을 점령 못했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 정경.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한 이들의 절개가 서린 곳이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 정경.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한 이들의 절개가 서린 곳이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첫째, 정유년 때 왜군은 임진년 때와 비교해 전력이 약해서였을까. 정유년 때도 12만 명의 왜군이 동원돼 임진년 때와 비슷한 규모였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조선 백성을 노예로 팔 수 있는 권한을 병사에게 부여했기에 개전 초기 왜군의 사기는 높았다. 게다가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해 왜군은 승승장구할 거로 보았다.

둘째, 임진왜란은 5년이었는데 정유재란은 2년으로 기간이 짧아서였을까. 짧은 전쟁 기간은 한양 점령과 큰 관련이 없다. 임진년 때 한양이 점령된 건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20일 만의 일이다. 그러니 2년간 계속된 정유재란에서 왜군이 잘 싸웠다면 한양 점령은 얼마든 가능했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자 왜군은 남해안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했으므로 전쟁 기간이 5년이라도 실제 전투가 벌어진 건 1년이 채 안 된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셋째,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이 충청도 직산에서 왜군을 물리쳐 왜군이 더 북상할 수 없어서였을까. 이것이 주로 언급되는 이유인데 직산 전투에 참여한 양쪽 군대의 규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이를 이유로 내세우기 힘들다. 왜군이 직산에서 전투를 벌인 건 한양으로 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명연합군을 경상도로 유인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직산 전투는 전주성에서 부상병 치료 등을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왜군의 양동작전으로 보인다.

넷째,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서였을까. 이는 상당 부분 관련이 있다. 서해로 들어오는 왜군 보급로가 끊겨 이런 상태에서 한양을 침공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군의 주력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명량해전의 승전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황석산성 전투로 왜군의 전라도 진입이 늦어져 이순신이 명량해전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서다.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황석산성 전투가 우리 역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안타깝다.

왜군 사상자만 4만8000명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이들의 위패를 모신 황암사 사당. 무명의 희생자인 백성을 중앙에 모셨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황석산성에서 순국한 이들의 위패를 모신 황암사 사당. 무명의 희생자인 백성을 중앙에 모셨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정유재란 때 왜군은 두 방향으로 쳐들어왔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7만5000명의 우군은 부산으로 들어와 창녕-합천-함양 방면으로 쳐들어왔고,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끄는 4만5000명의 좌군은 사천·웅천-광양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북상해서 쳐들어왔다. 이처럼 경상도를 위쪽과 아래쪽에서 각각 좌우로 횡단한 우군과 좌군은 전주성을 함께 공격한 뒤 우군은 한양을 향해 계속 진격하고, 좌군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전라도 곡창지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차질이 생겼다. 우군이 황석산성 전투에서 조선 백성군으로부터 큰 타격을 받아서다. 향토사학자 박선호가 쓴 『백성의 전쟁』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7만5000명의 왜군 중 4만8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때문에 우군은 전주성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전주성은 좌군에 의해 이미 함락된 상태였다. 좌군과 우군의 전투 결과가 왜 이렇게 갈렸을까. 산성 싸움 여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좌군은 남원에서 산성 싸움을 하지 않아 조·명연합군을 이긴 데 반해 우군은 함양에서 산성 싸움을 벌여 큰 피해를 보아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기존의 기동방어 전략을 산성을 중심으로 한 거점방어 전략으로 바꾸었다. 산성 싸움을 벌여야 왜군의 조총 공격을 무력화할 수 있어 남원에선 왜군을 교룡산성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이 교룡산성을 버리고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이 10배가 넘는 4만5000명의 왜군과 전투를 벌이려면 당연히 산성 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양원은 산성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룡산성을 포기했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남원성을 사수했던 4000의 병사와 6000의 백성은 죽음을 맞이했다. 남원의 만인의총은 이래서 세워졌다.

전사자·부상자 코까지 잘라

황암사 경내의 의총. 의총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보기 흉하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황암사 경내의 의총. 의총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보기 흉하다. [사진 함양군청, 김정탁]

한편 우군은 창녕의 화왕산성을 그대로 지나쳤다. 곽재우의 의병을 겁낸 탓도 있지만, 산성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합천의 벽견산성에선 조선군 방어가 허술해 싸움을 벌였다. 벽견산성을 사수하는 데 실패한 조선 백성군 1000여 명이 황석산성으로 옮겨가자 왜군은 여기를 다시 공격했는데, 여기선 주력을 상실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전투 결과가 부끄러워서인지 왜군은 황석산성 전투의 전모를 숨기고 조작까지 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황석산성 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한 예로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 숫자를 7만5000에서 2만7000으로 크게 줄였다. 이는 좌군의 4만5000과 비교해서 너무 적은 수다. 한양 함락이란 막중한 임무를 지닌 우군은 후방을 담당한 좌군에 비해 당연히 병력이 많아야 한다. 또 우군 숫자를 이렇게 줄이면 좌우군을 합해봐야 7만2000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면 정유년 때 동원된 12만 명 중 나머지 4만8000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물론 우군 일부만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군이 전주성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황석산성 전투에서 피해를 본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물론 닷새간 치른 전투에서 4만5000명의 왜군이 죽거나 다친 사실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박선호는 일본 측 사료를 토대로 왜군 내에 자체 분열이 생겨나 사상자가 이렇게 많이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왜군의 자체 분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허락한 노예 팔기 때문에 벌어졌다. 병사가 노예를 팔려면 조선군과 명군의 코 세 개를 베어야 하는데, 이를 쉽게 확보하기 위해 왜군 전사자와 부상자의 코까지 베는 가운데 자중지란이 생겨났다. 게다가 우군 대장 모리가 큰 부상을 당해 휘하 군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없어 이런 참극이 방치됐다.

조선인 혼 담긴 황암사 불태워

정규군이 아니라 백성군과의 전투로 패한 데다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아군·적군을 가리지 않은 코베기여서 일본은 황석산성 전투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그래서 1910년 한국을 병탄하자마자 황석산성 전투에서 죽은 수천 명의 조선인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황암사를 불태웠다. 또 안의군을 없애고 거창군과 함양군 일부로 편입했다.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한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황석산성 전투가 결과적으로 임진과 정유전쟁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유 중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안의(安義)는 의로움(義)에 편안하다(安), 즉 의롭게 사는 게 편안하다는 말이다. 황석산성 전투를 지휘했던 민간인 군무장 유명개, 홍의장군 곽재우의 당숙인 안의현감 곽준, 지병으로 함양군수를 사임했음에도 함께 남아서 싸웠던 조종도는 가족들과 함께 기꺼이 ‘안의’의 길을 택했다. 또 황석산성 인근에 살았던 안음·함양·산음(산청)·거창의 수천 명의 백성도 이 길을 따랐다. 한양의 사족만 대접받는 조선사회에서 이들이 목숨까지 버려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맹자는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정의한다. 요샛말로 ‘쪽팔리지 않는’ 마음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우리의 산하는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쪽팔리게 살았으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황석산성 전투를 치른 수천 명 백성은 쪽팔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해도 신화의 주인공이라도 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