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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코리아부와 샤이 K팝 팬을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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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BTS와 한류, 또 진화하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때 세계 평화 메시지는 존 레넌, U2 같은 서구 아티스트나 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다르다. 지난달 31일 미국 백악관에서 BTS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아시아계 대상 혐오 범죄, 차별, 다양성 등을 얘기한 장면은 완전히 달라진 세계를 보여준다. 영미권에 비주류였던 K팝의 높아진 위상은 물론이고, 소수자성·다양성의 상징인 K팝을 무기 삼은 K팝 팬덤의 사회적 파급력도 웅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BTS에게 “여러분이 하는 일은 큰 변화를 만든다. 혐오는 근절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여러분의 뛰어난 재능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메시지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이든 정부의 BTS 초청은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현지 청년 세대와 이민자를 의식한 행보란 분석도 나온다.

백악관 초청, 차별반대 외친 BTS
K팝과 K팝 팬덤 달라진 위상 입증
영미권 문화 다양성 견인하는 한류
문화 확대 차원 넘어 세계사적 의미

인종차별 반대 아이콘 BTS

지난달 31일 미국 백악관에 초청을 받은 BTS가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아시아계 증오범죄 대응’ 등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사진 빅히트뮤직]

지난달 31일 미국 백악관에 초청을 받은 BTS가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아시아계 증오범죄 대응’ 등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사진 빅히트뮤직]

BTS는 이미 여러 번 인종차별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2년 전 ‘BLM(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캠페인 본부에 100만 달러 성금을 냈고, 지난해 3월 아시아계 여성 6명이 숨진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 이후 ‘스톱 아시안 헤이트’ 캠페인에도 동참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증오와 극단주의 연구센터에 따르면 2020년 3월부터 지난해까지 아시아계 증오범죄는 1만건 넘게 발생했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300% 증가했다. “나와 다르다고 잘못은 아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평등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BTS 멤버 슈가가 한 말이다.

‘제2의 비틀스’‘MZ세대 대변자’로 추앙받지만, BTS야말로 그간 여러 차별과 편견에 노출돼온 당사자다. 동양인 외모 비하에, 한국 남자 아이돌 특유의 예쁘장한 외모와 멤버 간 스킨십을 놓고 ‘동성애자’ ‘게이팝’이란 비아냥도 들었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는 한 독일 라디오 DJ가 바이러스에 빗대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번 백악관 초청에 대해서도 폭스 뉴스의 한 앵커는 “미국의 급을 떨어뜨렸다”고 깎아내렸다. 평소 이주민과 유색 인종 비하 발언으로 악명높은 앵커다. 이지영 한국외대 세미오시스연구센터 연구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BTS는 그간 수없이 많은 인종차별적 편견에 시달려온 존재고, 이런 차별에 대한 저항이 팬덤의 정체성”이라며 “이걸 눈여겨본 백악관이 이들을 인종갈등 봉합의 고리로 보고 이번 자리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코리아부와 문화 다양성 사이

백악관 철제 펜스에 몰려 든 BTS의 팬들. [사진 빅히트뮤직]

백악관 철제 펜스에 몰려 든 BTS의 팬들. [사진 빅히트뮤직]

최근 미 주류 사회에 등장한 ‘코리아부(Koreaboo)’란 말이 있다. “한국과 한국인, 한국 대중문화에 과도한 집착을 보인 나머지 한국어를 무작위로 사용하고 한국인처럼 행동하며 한국인 애인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원용진)을 뜻한다. BTS 지민을 닮고 싶어서 무려 18차례 성형수술을 한 영국 인플루언서 울리 런던이 대표적이다. 런던은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한다고 공개 천명한 이후 끊임없는 살해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코리아부는 얼핏 서구 한류 팬의 비뚤어진 팬심을 겨냥하는 말 같지만, 본질은 한국과 아시아 문화, K팝 팬덤 자체에 대한 비하다. 2000년대 초 일본 대중문화의 열성적 미국팬들을 경멸조로 불렀던 ‘위아부(Weeaboo)’의 변형이다.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해 팬심을 숨기는 ‘샤이 케이팝 팬’들도 등장했다.

물론 다수 K팝 팬들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에서 K팝·한류의 인기는 인종 구조 변화,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관과 교육으로 무장한 MZ 세대의 등장 등 미국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해석된다. 수년간 꾸준히 강화된 ‘다양성과 포용성(D&I·Diversity and Inclusion) 교육’도 한몫했다. K팝 팬인 여고생 엘리자베스 퀸은  “(K팝 남자 아이돌을) 여성적이라고 비난하거나 코리아부 같은 단어를 쓰는 사람은 분명 자존감이나 다문화, 포용성에 대한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한류, 다음』). K팝을 수용하고 열광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 다양성에 열린 태도의 증거라는 뜻이다. 2019년 ‘기생충’이 OTT 훌루에 공개됐을 때 일부 미국 관객이 “(한글)자막을 읽어야만 하는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자, 훌루 측이 “자막이 읽기 싫다면 언제든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응수한 적이 있다. 미국인의 강고한 영어중심주의가 깨지던 상징적 장면이다.

이성민 방통대 교수는 ‘오징어 게임’에 대해 “마이너한 감성으로 소외됐던 취향 그룹이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 단위에서는 의미 있는 다수를 구성할 수 있게 됐다”(『오징어 게임과 콘텐츠 혁명』)고 분석했다. 소수 취향이어도 디지털 환경에서 세계 곳곳의 소수 취향이 합해지면서 거대한 흐름이 된다는 얘기인데, ‘소수의 반란’으로서의 한류다.

‘모범적 소수’ 아시아계 이민자의 이중성

BTS에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한국계 이민자 스토리인 ‘미나리’, ‘파친코’까지 한류 콘텐트의 엄청난 인기와 아시아계 증오범죄의 급증은 얼핏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회옥 명지대 교수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에서 “감염병 시기의 전통적인 ‘희생양 찾기’, 경제위기, 정치 엘리트의 반아시아인 선동, 미·중관계, 미국 인구 구성 변화에 대한 위기감” 등을 이유로 꼽았다. 실제 2020년은 백인이 16세 이하 세대에서 최초로 소수인종이 된 해다.

‘백인보다는 열등하지만 흑인보다는 우월한’ 아시아계 이민자의 중간자적, 이중적 위치도 주목할 만하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주류 규범을 잘 따르는 성실한 이미지로 1960년대 이후 미국 사회에서 모범적인 소수자,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로 불려왔다. 방희경 서강대 국제한국학선도센터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인종 집단에게 ‘아시아인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지 않아서’ 인종 문제나 불평등이 발생한 것이라는 착시를 만들어내며, 아시아계와 라틴아메리카계 혹은 아프리카계 사이에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고 썼다(『한류, 다음』).  백인을 향한 흑인의 분노가 아시아계를 향해 굴절돼 표출되기도 한다는 설명이다.

‘모범적 소수자’ 이미지는 아시아 남성의 ‘남성성 탈색’으로도 이어졌다. 수학은 잘하지만 사교성이 부족하고 성적 매력 없는 공부벌레 이미지의 탄생이다. 이런 스테레오타입은 BTS와 케이팝 아이돌에 와서야 비로소 깨지고 있다.

한편 BTS를 초청한 바이든 대통령은 아일랜드계로, 흥미롭게도 아일랜드인은 “19세기만 해도 백인이 아니라 흑인으로 간주되어 심하게 배척당했다.”(『아시아인이라는 이유』). 미국 건국 초기 ‘백인성’의 범주는 매우 좁아 독일·아일랜드·이탈리아 출신의 비앵글로 유럽인은 온전한 주류 백인 아닌 ‘하얀 흑인’으로 분류됐단 얘기다. 『누가 백인인가?』의 미국 맥퍼슨대 진구섭 교수는 “지난 220여년 동안 실시된 미국 인구조사에서 인종 범주가 24번이나 바뀌었다”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인종 범주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영구적이고 고정된 울타리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줄곧 변하는 가공물”이라고 썼다. 학자들에 따라 인종 수는 3개에서 63개 종까지 다양하게 제시된다.

지금 한류는 “현대사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문화 패러다임의 변화”(유니 홍)를 넘어 영어권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작동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서구 주류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견인하는 동력으로 K팝·한류가 활용된다는 게 지금 한류의 진정한 세계사적 의미다. K팝 팬덤의 정치세력화도 빠르게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는 2020년 6월 K팝 팬들이 집단예매취소 방식으로 트럼프 선거 유세를 무력화시킨 것을 기점으로 K팝 팬덤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확연히 달라졌다.

반면 막상 ‘K팝의 중심’ ‘차별반대·인권 전도사’ BTS 보유국 한국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조차 15년째 공전 중이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들의 선한 영향력은 한국에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