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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시대는 새로운 세대 원해…젊은 정치인 키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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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 정당정치의 위기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현대 정치에서 정당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당은 정치에 대한 이념이나 정책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단체를 의미한다. 이념과 정책은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한 사회를 구성하는 특정한 계층과 계급을 대변한다. 다양한 정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권자들 또한 여러 이념과 정책을 보고 투표를 한다.

정당의 또 다른 역할은 새로운 정치인 육성이다. 정치인도 인간이기에 영원할 수 없고, 특정한 이념을 가진 정치인이 수십 년 동안 특정 계층이나 계급을 대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치인을 영입하고, 이들을 훈련해 새로운 지도자로 거듭나게 해야 하는 것이 정당의 또 다른 역할이다.

정당의 역할은 ‘새로운 피’ 육성
여야 모두 특정인물·지역에 의존
현실에 맞는 정책·이념 제시 못해
2024 총선, 2027 대선 때는 변할까

진보정당의 기원은 보수정당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정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이렇건만 한국 현대사에서 정당의 역사를 보면 쓴웃음이 나온다. 정당이 앞에서 정의한 역할을 과연 수행했는지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당은 너무나 많이 바뀌었다.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건국 이래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것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적 측면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정당은 미군정 시기에 설립된 한국민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당시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에 대립하는 보수정당이었다. 그런데 그 보수정당은 1950년대 정통 야당이었던 민주당,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신민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의 기원이 됐다.

심지어 평화민주당이 ‘꼬마’민주당과 합당을 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되면서 ‘보수’가 아닌 한국 사회의 ‘진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통합민주당,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을 거쳐, 2015년 12월 더불어민주당을 창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수에서 정통 야당으로, 그리고 다시 진보의 아이콘이 됐지만, 진보정당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역시 보수 정당으로 규정하고 있다.

1인만 바라봤던 집권여당

그렇다면 보수 정당은 오랜 역사를 갖고 이념과 정책을 발전시키고 있는가. 자유당과 민주공화당, 그리고 민주정의당은 각각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 그리고 전두환 정부를 통해 장수한 집권 여당이었다. 그러나 이념과 정책을 얘기하기에는 너무나도 1인 정당이었다. 집권자 1인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에 집권자가 내려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민주공화당의 출발은 달랐다. 민주공화당은 자유당과는 다른 정당을 만들기 위하여 지방에서 새로운 인물을 영입했고, 2인자의 세력이 당내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69년 삼선개헌을 거치면서 이러한 특징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1972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민주공화당도 모자라서 유신정우회라는 꼭두각시 정당을 만들기도 했다. 정부가 입법기구를 장악하면서 삼권분립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87년의 민주화를 거치면서 집권 여당도 변신을 꾀했다. 1990년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보수정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통일민주당이 참여하면서 보수의 기원이었던 한국민주당 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했고,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함께했다.

이름을 외우기도 힘든 정당명

민주자유당은 한국 사회의 보수 인사들을 총망라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보수에 맞는 이념과 정책을 정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김종필 계열이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만들면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은 모두 정책과 이념보다는 지역정당이 됐다.

민주자유당은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면서 쇄신을 꾀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보수의 이념과 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금융위기와 함께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하여 처음으로 보수 야당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야당이 된 신한국당은 대선에 승리하면서 2008년 한나라당으로 개명했고, 2012년에는 박근혜 후보의 등장과 함께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다시 바꾸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일부 인사가 탈당하여 바른정당을 창당하자 자유한국당으로 개칭했고,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다른 보수정당과의 연합을 통해 미래통합당을 거쳐 국민의힘으로 다시 당명을 바꾸었다. 2000년대 초까지는 진보세력의 정당이 계속 개칭했던 반면, 1996년 이후에는 보수 정당이 더 자주 당명을 바꾸었다.

1990년 범 보수 정당으로서 민주자유당이 창당했지만, 당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대표,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대표에 이르기까지 인물 중심인 정당이었다. 지역에 강한 기반을 가진 것 역시 범진보 정당과 다르지 않았다.

전통을 만들기 어려웠던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의 정당이 이렇게 긴 역사와 전통을 갖지 못하고 계속 바뀌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당의 성격과 이름이 바뀌는 것인데, 한국의 정당에서는 정책과 이념의 변화없이 1인 지도자와 특정 지역에 의존하는 관성이 계속된 것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근대 정치의 역사가 길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1945년 이후에 가서야 근대 정치를 시작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당이 정책과 이념을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역사가 오래된 정당의 이름과 조직을 바꿀 수 없었던 국가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한국현대사의 기간을 통해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정당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냉전 초기 전쟁을 겪으면서 최빈국을 경험했고,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선도주자가 되었다.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이러한 위기를 이겨내면서 이제는 추격국가에서 선도국가로 발돋움하는 시점에 와 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한두 개의 정당이 오랫동안 버티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1955년 이후 자유민주당 체제 아래에서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일본 정치가 더 연구 대상일 수도 있다.

남들이 못해서 승리한 선거

그러나 막상 더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 세대를 양성하지 않는 정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는 현재 상황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선거를 보면 내가 잘하기보다는 남이 못했기 때문에 승리한 선거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면 남이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에 맞는 정치인을 길러내지 못했고, 이를 통해 시대에 맞는 정책과 이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비단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해서 나타난 문제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정치의 거목이 있을 때는 소위 ‘젊은 피’의 수혈이라는 현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초선의원들의 모임 역시 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1945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정당들은 후속 세대를 체계적으로 길러내지 못했으며, 정책연구소를 통한 정책정당으로의 환골탈태를 하지 못했다.

지금 시대는 새로운 이념과 정책,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을 원한다. 2022년 선거에서 그러한 시대적 소명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동안 양성한 후계자들이 없으니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을 내세울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2024년 총선과 2027년 대선에서 현재의 정당들이 또다시 부딪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학계와 언론계도 바뀌어야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기존의 정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인물이 필요하다. 그동안 외면받았던 1970년대부터 90년대생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정치지향적이 아니면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인재들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들 세대를 어떻게 정치에 입문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을 만들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TV에 한두 번 나왔다고 정치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학계나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학계와 언론계 중심에는 50대 이상의 중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세대에게 길을 열어줄 때가 되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되고 나면, 종신교수직을 받기 위해 또다시 연구 성과를 양적으로 채워야 한다. 이런 제도 아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혁신적 연구가 나올 수 없다. 시대를 바꾸어가는 데 핵심이 되는 정치와 학계, 그리고 언론계가 이제 후속 세대를 위해 그 길을 열어줄 차례다. 그래야 미래가 선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