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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에 반찬 올려주던 그, 무대선 청중 휘어잡던 상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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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송해 평전’ 쓴 오민석 교수 추모글 

아, 우리 시대의 거대한 기둥이 쓰러졌다. 30여 년간 일요일이면 전국에 울려 퍼지던 그 우렁찬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와 함께 울고 웃던 애환과 위로와 눈물의 시대도 끝났다. 1927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개발 도상국 시대를 거쳐 한류 열풍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에는 형극 같은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희망이 각인되어 있고, 유랑극단에서 ‘K-문화’의 거대한 흐름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사의 파란만장한 주름이 새겨져 있다.

송해 선생(왼쪽)과 그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 를 펴낸 오민석 교수. [사진 오민석]

송해 선생(왼쪽)과 그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 를 펴낸 오민석 교수. [사진 오민석]

7년여 전에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쓰기 위해 송해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희대의 대중 스타가 아니라, 현대사의 가시밭길을 홀몸으로 헤쳐온 고단한 한 사람을 느꼈다. 여러 면에서 나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존재였던 그가 불쌍했다. 인터뷰 과정에서도 번번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울지 않으면, 그가 울었고, 그가 울지 않으면 내가 울어서, 그의 살아온 날들을 묻는 인터뷰는 자꾸 중단됐다. 어떤 때는 그 꼴을 마주 보고 서로 박장대소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매우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던 어느 날, 서울 낙원동 백반집에서 함께 식사할 때, 선생님은 내 숟가락에 자꾸 반찬을 올려 주셨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이미 중늙은이였던 나는 마치 엄마에게 밥을 얻어먹는 아기처럼 그의 다정(多情) 앞에 무너져버렸다. 평전을 내고 강남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도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무대 위에 오르셨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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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선생은 꾸밈없고 소탈하기 그지없는 분이었다. 무대복을 뺀, 그가 입는 옷 대부분이 전통시장 패션이었다. 녹화가 없는 날 오후 네 시 경이면 사무실 근처 목욕탕에 가서 맨몸으로 시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고 때를 미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내가 선생님을 우연히 만나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곳도 낙원동의 한 허름한 목욕탕이었다. 그는 내게 전화번호를 주었고, 나는 내 시집과 함께 연락처를 드렸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다.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그는 내 시집을 읽었고, “소주나 한잔 하자”고 하셨다.

세 번째로, 내가 기억하는 그는 상남자 중 상남자이다. 선이 굵고, 경계가 분명하며, 카리스마 작렬하는 전문가였다. ‘전국노래자랑’을 이천몇백 회 넘게 녹화하면서도 그는 매번 처음 그 일을 하는 듯 달려들었다. 녹화 전에 너무 긴장해 스태프들이 항상 우황청심환을 준비했다. 막상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는 대기를 가르는 독수리처럼 좌중을 휘어잡았다. 술자리에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량에, 늘 호방하고 호쾌했다. 함께 술자리 하는 사람들은 그런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 시간이 오래 지속하기를 바랬다. 그와 함께 있으려면 상응하는 주량을 겸비해야 해 아무나 그 특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그는 가끔 노래를 불렀다. 사회자로서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는 성악을 전공한 명실상부한 가수이다. 그가 리허설에서 노래를 연습할 때,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그의 무서운 집중과 몰입, 그리고 무대에의 헌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때마다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잊고 노래에 완전히 몰두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대중예술에도 ‘숭고미’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처럼 엄숙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인해 ‘전국노래자랑’이 들판이나 거리가 아닌 실내 스튜디오 녹화로 전환됐고, 선생님도 서서히 늙어갔다. 여러 차례 병원을 들락거려도, 그때마다 선생님은 기적처럼 회복했다. 그러나 시간의 칼날 앞에 선생님도 점점 무너져갔다. 푸근하던 풍채는 점점 왜소해졌고, 고난의 긴 세월을 헤쳐나온 불쌍한 작은 몸은 더 작아졌다. 평생 그리던 어머니도 결국 생전에 뵙지 못했다. 교통사고로 잃은 아들 때문에, 그의 가슴엔 늘 휑한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온갖 성취와 영광과 명예의 풍요 속에서도 그는 늘 가난했고, 우울했고, 슬펐다. 사막의 먼지 속을 헤매는 늙은 코끼리처럼 그는 긴 생애를 견디고 또 견뎠다. 이제 그 모든 시간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선생님은 높은 산정의 외로운 호랑이처럼 우리 곁에 늘 남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울다가 이 글을 쓴다. 선생님, 선생님과 동시대를 살아서 행복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승에서의 유랑 청춘을 다 잊으시고, 그 모든 비극과 불행과 고통도 다 잊으셔요. 눈물로 수십 년을 그리워한 어머님과 아드님, 그리고 몇 해 전 소천하신 사모님도 이제 다 만나실 수 있잖아요. 우리는 선생님의 다정함과 강하심과 딱하심을 기억하며 또 한세월을 건너갑니다. 선생님, 안녕.

오민석 시인·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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