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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식량 등 공적개발원조 확대로 한국도 세계에 기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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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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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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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생활 물가가 뛰면서 정치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전 세계적으로 각종 원자재 수요가 치솟고, 여기에 더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방 경제제재로 에너지·식량 공급망이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있어서다.

물가는 과거 기록을 계속 소환한다. 한국의 지난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5.5%로 세계 금융위기를 겪었던 2008년 8월(5.6%) 이후 13년 9개월 만에 최고다. 외식물가는 7.4%가 뛰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았다. 특히 석유류는 지난달 전년 대비 34.8%나 치솟았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5.4% 중 1.5%포인트를 끌어 올렸다니 ‘주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먼 곳의 전쟁도 남의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포스트 코로나와 우크라 전쟁으로
세계는 식량·에너지가격 인상 몸살
이웃돕는 인도주의 ‘자비국가’ 돼야
북한도 백신·식량 지원 받아들일것

이 충격은 경제 대국 미국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다. 여론조사 전문 파이브서티에이트에 따르면 지난 3일로 취임 500일을 맞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40.8%였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같은 시기 기록인 41.6%보다도 뒤졌다니 펄쩍 뛸 일이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 이후 최하라니 무슨 말을 더할까.

대한적십자사가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영유아를 위해 지원한 분유 1만 팩이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트럭에 실려 운송되고 있다. [뉴스1]

대한적십자사가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영유아를 위해 지원한 분유 1만 팩이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트럭에 실려 운송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53%로 시작한 바이든의 지지율을 이렇게까지 끌어내린 최대 요인으로 40년 만에 최고라는 인플레이션이 꼽힌다. 특히 기름값 상승에 대한 소비자 불만이 가장 큰 것으로 지목된다. 오는 11월 8일의 중간선거를 딱 반년 앞둔 바이든으로선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 정도라면 사실상 전 세계 대부분의 기업·정부·가계 ‘살림살이’는 오죽할까. 식량과 연료 가격의 고공행진은 각국에서 정권 안보 사안이며, 가장 가난한 나라에선 인도주의 위기와 직결된다. 더욱 문제는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에 눈길을 빼앗긴 사이 취약 지역이나 한계 국가에서 무관심 속에 비극이 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전 중인 예멘과 시리아와 에티오피아에선 분쟁과 폭력, 기아와 인권유린 속에 주민들이 신음한다. 국제인도주의 기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코로나에 이은 세계적인 공급 부족과 비용 증가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조만간 인도주의 기관 수장들의 도움 호소와 각국 순방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8240만 명이 가난·분쟁·폭력·기후재앙·인권유린 등으로 강제 이주됐다. 눈여겨볼 점은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이동이 제한됐음에도 국경을 넘은 난민을 비롯한 강제이주민은 오히려 늘었다는 사실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사헬 지역 등에서 기후재앙이 계속돼 식량 위기가 악화하자 마실 물과 허기를 면할 식량을 구하려고 살던 곳을 떠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 5월 초 유엔·유럽연합(EU) 등과 공동으로 발표한 ‘식량 위기에 대응하는 글로벌 네트워크’ 연례보고서에서 전 세계가 역대 최악의 식량 수급 불안정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1년 전 세계 53개 국가와 지역에서 약 1억9300만 명이 ‘위기 수준’의 기아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가장 열악했던 것으로 평가됐던 2020년보다 4000만 명이 늘어난 숫자다. 더 큰 문제는 올해 사정은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라는 점이다. 특히 에티오피아·남수단·예멘과 마다가스카르의 남부 주민 중 57만 명은 긴급 식량 지원 없이는 생계와 생존을 포기할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지만, 개발원조(ODA)는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한국의 지원 규모는 25억 달러로 29개(국제기구인 EU 제외) DAC 회원국 중 15위였다. 한국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떨어지는 스페인(27억900만 달러)·덴마크(25억4100만 달러)·벨기에(22억800만 달러)와 비슷하다.

GDP 대비 지원 비율은 0.15%로 24위다. 유엔 권고치인 0.70%의 5분의 1 수준이며, DAC 회원국 전체 평균인 0.38%의 4할 정도다. 2030년까지 0.30%로 늘리겠다지만, 경제 규모에 비해 원조가 태부족이긴 마찬가지다.

특히 1인당 지원액은 37.13달러로 DAC 21위다. 19위인 일본(73.58달러)의 절반 수준, 1위인 노르웨이(812.58달러), 2위인 스웨덴(701.58달러)의 대략 20분의 1 정도다. 경제 규모를 보면 한국의 대외 원조는 인정을 강조하는 ‘자비로운 국가’ 축에 끼지 못한다.

시장에 장을 보러 가면 가슴이 답답하긴 하지만, 경제 통계를 보거나 해외에서 무슨 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들으면 괜히 가슴이 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포스트 코로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에서 힘든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국이 이들을 돕는 자비 국가로 나설 필요가 있다. 어려울 때 도와야 친구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6·25전쟁 재건부터 경제성장, 외환위기 극복까지 글로벌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이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이렇게 ODA에 적극적인 국가로 자리 잡게 되면, 북한도 코로나 백신이나 긴급 식량 지원을 받아들일 여지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혜택은 북한 정권이 아닌 인도주의 위기에 시달리는 주민에게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