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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은 디테일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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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근대 건축의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로 알려진 명언이 있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가 대표적이다. 미스도 아마 이 말을 했을 것 같지만, 처음으로 한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가 태어나기 전인 1855년에 로버트 브라우닝이 발표한 시에 이미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도 비슷하다. 뉴욕타임스가 미스의 부고 기사를 쓰면서 그의 발언으로 소개해 유명해진 경구이기는 하다. 하지만 독일의 문화이론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같은 말을 먼저 했다는 설도 있고, 구스타브 플로베르·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슷한 표현을 훨씬 전에 썼다는 얘기도 있다.

정말 디테일에 악마가 있을까
실무자 의심하는 결정권자들
정밀한 현실 파악이 실력이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슬로건을 놓고서 여러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갑론을박을 벌였다. 나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경구에, 그 주장이 한국에서 쓰이는 양태에 트집을 잡아 보려 한다. 단순히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면 왜 거기 신이 있다고 하지 않고 악마가 있다고 경계하는 걸까. 디테일에 당했다는 마음이 깔려 있어서 그렇다.

실무를 두려워하고 실무자를 불신하는 결정권자들이 이 말을 쓰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좋은 의도로 내린 큼직한 결정이 현장에서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그리고 현장의 논리가 나름대로 타당할 때, 어떤 결정권자들은 하부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실무자를 원망한다. 자신을 은밀히 거부하는 실무자들이 세부 사항 사이에 악마를 숨겼다고 의심한다.

정치권이나 법조계 바깥에서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 여당 의원이 되어 당정 협의를 하면서, 장관이 되어 한 부처를 이끌면서, 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 말을 종종 입에 올린다. 대개 원망과 의심의 대상은 직업 관료들이다. 박근혜·문재인 두 전직 대통령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디테일 속 악마를 말했다.

반면 과학자나 공학자가 디테일을 악마의 거처로 부르는 광경은 상상이 안 간다. 어느 엔지니어가 “내가 만든 이론은 아름답고 정교한데 현장의 디테일에 속았다”고 주장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게다. 가설을 세울 때의 좋은 의도를 강조하거나 실험실 조교의 악의를 의심하는 연구자도 마찬가지다.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꼼꼼하지 않은데 취재를 잘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젊은 기자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대단한 구루인 척, 각종 담론을 읊는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의 밑천을 후배들은 곧 알아차렸다. 사회 비판, 어렵지 않다. 책 몇 권 읽으면 아무나 할 수 있다. 정밀하게 팩트를 챙기는 게 실력이다.

석 달 동안 전국 단위 선거를 두 번 치렀다. 선거를 치를수록 ‘586’ 정치인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점점 힘을 얻는 모양새다. 586 정치는 뭐가 문제였을까. 여러 진단이 나오는데, 나는 디테일을 무시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자신들의 관념과 당위가 현장에서 통하지 않으면 586 그룹은 실무자를, 기업인을, 욕망을 지닌 보통 사람들을 탓했다. 관료와 경제학자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그런 태도가 오만과 독선으로 이어졌다.

야당의 20대 비대위원장이 586그룹의 대안으로 소개될 때 나는 혼자 고개를 갸웃했더랬다. 젊은 비대위원장도 어떤 면에서는 그가 비판하는 586들과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뛰어든 판의 세부 지형과 경기 규칙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커다란 관념과 당위를 앞세웠다. 그 역시 디테일에 약했다.

극성 정치 팬덤도 디테일에 무관심하다. 세상을 고해상도로 봐야 복잡한 현실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해상도를 낮출수록 만사가 선악의 대결에 가깝게 보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해야 할까. 어떤 신념과 정의감은 디테일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새 대통령도 디테일에 강한 타입은 아닌 듯하다. 정책 세부 내용을 장악하지 못하는 모습은 이미 대선 TV토론에서 보여줬다. 검사라는 한 길만 걸어온 정치 초보 대통령이 ‘통 큰 리더십’ 이미지까지 선호하니, 솔직히 걱정이 된다. 사소한 일에만 몰두하는 ‘주사급 장관’, ‘대리급 부장’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악마만 디테일에 있으랴. 모든 게 디테일에 있다. 그러므로 디테일을 알아야 한다. 디테일은 넓고 많고 다채롭고 일견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노력도 많이 든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디테일을 조사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우리는 공부라고 부른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