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검찰총장 후보 박찬호 사의 “명예회복된 지금이 내려놓을 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0년 1월 13일 박찬호 당시 제주지검장. 뉴스1

2020년 1월 13일 박찬호 당시 제주지검장. 뉴스1

검찰총장 후보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됐던 박찬호(56·사법연수원 26기) 광주지검장이 사의를 밝혔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엔 2차장 검사, 총장 재직 땐 대검찰청 공공수사부장을 맡아 3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대표적인 ‘윤석열 사단’ 검사로 꼽혔다. 그래서 현직 중 이원석(54) 대검 차장검사, 이두봉(58) 인천지검장과 더불어 차기 총장 후보군으로 일찌감치 하마평에 올랐었다.

추미애 장관 때 제주로 좌천…尹 당선되자 검찰총장 후보군 물망

박 지검장은 7일 오전 검찰 내부망인 e프로스(e-PROS)를 통해 “명예가 회복된 지금이 검사직을 내려놓을 때라 생각된다”라며 사직의 글을 올렸다. 그는 연수원 27기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원석 대검찰청 차장검사보다 한 기수 선배다. 하지만 이날 검찰 내부에선 총장 후보로 거론돼오던 박 지검장이 사표를 낸 게 급작스럽다란 반응들이 나왔다.

박 지검장은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이던 2017년 8월 중앙지검 2차장검사로 부임해 함께 일했다. 윤 대통령의 검찰총장 재직 시절인 2019년 7월엔 대검찰청 공공수사부장에 기용되며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2020년 1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 취임 직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20년 1월 제주지검장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고 2021년 6월 광주지검장으로 이동했다. 이와 관련해 박 지검장은 “제주와 광주로 발령받았을 때 안팎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렸지만 패기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분위기가 반전됐다. 고검장 승진 후보, 차기 검찰총장 후보군 등으로 물망에 오르내렸다. 박 지검장은 “오랜 시간 인내한 결과 감사하게도 명예가 회복되는 기회가 와서 매우 기쁘고 마음이 가벼워졌다”라며 “원래 자리보다 일을 중시했고, 명예가 회복된 지금이 검사 직을 내려놓을 때라 생각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검사로서 받은 은혜가 너무 커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지금 그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드리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다만 그는 “제 사직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거나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박 지검장은 “밖에서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검찰이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본분을 수행하도록 항상 응원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겠다”라고 강조했다.

박 지검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 정치권이 검찰의 중립성을 침해했다는 취지의 비판도 사직 인사에 담았다. 그는 “최근 우리 사회에 정치적 진영논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법치가 무너져가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 우리의 순수성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을 보며 너무 괴로웠다”라고 썼다. 또 “검찰 내부의 동료 간 믿음과 화합마저 예전과 같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라고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더불어민주당이 강행 처리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해 쓴소리도 남겼다. 박 지검장은 “검수완박 상황에 이르러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진행된 형사사법제도 변경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랑하는 검찰 가족 여러분.

저는 이제 검사직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검찰이 어려운 때에 사직하게 되어 너무 죄송합니다. 이미 ‘검수완박’ 국면에서 검찰 고위직의 한 사람으로서 직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습니다. 보통사람인 저로서는 진퇴결정이 쉽지 않았고 여러 사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검사로 임용된 후 외부기관 파견이나 유학도 없이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반송자족’ 의 마음으로 오로지 검찰 내에서만 일하며 버텼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건에 직접 관여하거나 지켜봤습니다. 저의 조건과 배경에 비춰 ‘이만하면 과분하다’는 생각으로 욕심내지 않고 검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검사로서 스스로 떳떳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내내 긴장과 고민의 나날이었지만 훌륭한 선후배 검사와 수사관, 실무관, 파견직원 등과 서로 믿고 격려하며 동고동락하는 것이 너무 좋아 힘든 줄 모르고 세월이 가는 것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제주와 광주로 발령받았을 때 안팎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렸지만 ‘장풍파랑 회유시, 직괘운범제창해’(이백, 행로난)를 외우며 패기를 잃지 않으려고 하였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굴욕을 무릅쓸 각오가 있어야 한다’(조지훈, 지조론)는 대목도 되새겼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기회의 순간, 기억의 공간으로 삼겠다’고 생각하며 지내왔습니다.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은 물론 사직할 때도 명예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또한 망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오랜 시간 인내한 결과 감사하게도 명예가 회복되는 기회가 와서 매우 기쁘고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원래 저는 자리보다 일을 중시했고, 명예가 회복된 지금이 검사직을 내려놓을 때라 생각됩니다.

검사로 재직하는 동안 법과 원칙에 근거해 공정성,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 사회에 정치적 진영논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법치가 무너져가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 우리의 순수성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습니다. 검찰 내부의 동료 간 믿음과 화합마저 예전과 같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급기야 ‘검수완박’ 상황에 이르러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사적영역, 사법영역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는 정치적 진영논리를 근거로 시시비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검수완박’ 등 최근 일방적으로 진행된 형사사법제도 변경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희망해 봅니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이 남아 있으니...견디고, 분투하고, 찾고, 발견하고, 이겨낼 것이다...(알프레드 테니슨, 율리시스)’ 라는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검찰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용기 있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현명합니다. 훌륭한 동료들이 많으므로 지금까지처럼 이겨내 본연의 역할을 잘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자주 되새기던 구절을 적어봅니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아무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 하리라.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얻으며 마침내 그것은 터질 것이다.’ (에밀졸라, 나는 고발한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수사와 재판을 통해 진실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을 묻고, 법치를 바로 세우는 일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소통과 단결을 강화하고, 검찰이 스스로 중단없는 개혁을 통해 국민의 신뢰와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확보하기를 기원합니다.

검사로서 받은 은혜가 너무 커 저에게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지금 그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주제넘지만 제 사직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거나 또 다른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가당치 않은 걱정과 그렇게 되지 않기를 희망해 봅니다.)

밖에서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검찰이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본분을 수행하도록 항상 응원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도와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2. 6. 7 검사 박찬호 올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