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독자 서비스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 사진’을 찍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인연에 담긴 사연을 보내 주세요.
가족, 친구, 동료, 연인 등에 얽힌 어떠한 사연도 좋습니다.
아무리 소소한 사연도 귀하게 모시겠습니다.
아울러 지인을 추천해도 좋습니다.
추천한 지인에게 ‘인생 사진’이 남다른 선물이 될 겁니다.
‘인생 사진’은 대형 액자로 만들어 선물해드립니다.
아울러 사연과 사진을 중앙일보 사이트로 소개해 드립니다.
사연 보낼 곳: https://bbs.joongang.co.kr/lifepicture
photostory@joongang.co.kr
2021년 12월 마지막 날 아침, 일본 계시는 하마다 박사께 드리는 문안 인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새해가 되면 하마다 박사는 98세, 부인은 96세가 됩니다. 바다 건너 제2의 부모님인 하마다 박사 내외분과의 인연이 34년째에 이릅니다.
하마다 박사는 고 이병철 회장과 가장 가까웠던 분으로 대한민국이 반도체 산업을 시작하게 해 준, 실로 역사적 인물입니다.
이 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이 첨단기술 반도체로 세계에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알려진 정치인 신분이라 사연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살아생전 두 분께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2년째 뵈러 가지도 못하고 전화로 안부를 여쭐 뿐이니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닙니다.
두 분과의 인연은 88년 서울올림픽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삼성전자에서는 세계인의 축제인 서울올림픽에 이병철 회장을 도와 삼성의 삼성반도체 역사를 열어주신 VIP 두 분을 초청합니다. 당시 SSJ(Samsung Japan) 가타오카 박사와 NTT 하마다 박사였습니다.
두 내외분이 초청되었고 회사에서는 급하게 통역과 가이드를 맡을 여직원을 찾았습니다.
인사기록카드에 일본어(TOJIC) 자격이 있던 두 사람 중 가타오카 박사 부부는 당시 회사 번역 담당 고대리가, 하마다 박사 부부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갓 스물두살 말단 여직원이었던 저는 광주여상에서 배운 히라가나 가타카나 실력으로 회사에 들어와 연구원들 틈바귀에서 고군분투하며 일본어 자격만 취득한 상황이었지 일본인을 만나 이야기 한번 해 본 적 없는 완전 초보였습니다.
당시 일본어 자격증을 보고 기술기획과에서 통역이 가능한지 물어왔습니다. 저는 무조건 “제가 하겠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아이고! 내가 미쳤지!”하는 후회가 있었으나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통역과 가이드를 맡기로 하였습니다.
김포공항에서 맞이한 하마다 박사 내외는 첫인상부터 너무도 따뜻했습니다. 닷새간 안내를 하고 통역을 하는데 서툰 저의 모습에 한편으로 불쾌하실 만도 한데 두 분은 저에게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날 김포공항에서 하마다 박사가 제게 “일본으로 한번 초대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잘 못 들은 것은 아닌지 하면서도 불쑥, “언제 가면 될까요” 하고 말았습니다.
아뿔싸! 너무 무례한 것은 아닌가 했는데 곧 초청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더 놀랐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혼자서 외국이라는 곳을 처음 가게 되었고 난생처음 비행기도 타 보았습니다.
일본 동경 히가시야마토시에 있는 댁으로 초대되어 4박 5일을 여행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매년 일본과 대한민국을 오가며
정을 쌓아 왔습니다.
특히 주산 부기 타자만을 주로 공부했던 여상 출신 양향자가 세계적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기까지 하마다 박사는 33년간 스승이자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수백통의 자필편지를 보내주셨고, 어머니가 딸에게 물려주시는 것처럼 가지고 계신 소중한 것들을 주십니다.
결혼 후 남편과 아이들을 더 사랑해주시는 두 분과의 인연에 감사하며 이 사연을 짧게나마 보냅니다.
양향자 드림
지난해 12월 31일에 온 사연입니다. 처음엔 꽤 알려진 정치인의 사연이라 제쳐두었습니다.
2주쯤 지나 다시 사연을 곱씹어봤습니다. 이어 사연에 등장하는 하마다 시게타카(濱田成高·98) 박사 에 대한 이력을 찾아봤습니다.
그는 오래전 고 이병철 삼성전자 전 회장의 기술 자문역할을 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1세대 원로들 사이에는 ‘한·일 반도체 산업의 가교(架橋)’,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숨은 조력자’로 인정받는 터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주춧돌 역을 한 이가 바로 하마다 박사였던 겁니다.
하마다 박사에 대해 사전 조사하며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의 사연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로부터 일본으로 가는 데 꼬박 5개월이 걸렸습니다. 이 모두 코로나 19 때문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가며 사연을 보낸 양향자 의원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보낸 사연에서 ‘저는 이미 알려진 정치인 신분이라 사연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밝혔듯 저 또한 정치인이라 사연 선정을 미루었습니다. 곱씹으며 결국 사연만으로 판단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치인 양향자가 아닌 하마다 박사의 양딸인 향자씨에게만 시선을 집중할 겁니다. 어떠신가요?”
- “저도 마찬가지 이유로 사연을 보내며 망설였습니다. 제가 사연을 보내기로 결심한 건 스승, 부모로 모시는 하마다 박사 부부에게 이 인생 사진이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주신 그분들께 이것이 보답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 판단하여 사연을 보낸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하 정치인 양향자 의원이 아닌 하마다 박사 부부의 양딸인 향자씨로 호칭합니다.)
향자씨에게 물었습니다.
- “하마다 박사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씨앗을 심은 분, 혹은 반도체 산업의 길라잡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 “이병철 회장이 70년대 말 앞으로의 살길은 일본처럼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모두 반대한 거죠. 반도체에 대해 전혀 모르던 때였고 투자비가 얼마나 들지 아무도 예상 못 하던 때였으니까요. 그즈음 하마다 박사가 삼성전자에서 신기술을 강연한 계기로 이병철 회장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일본인이 했다면 한국인도 무조건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마다 박사에게 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하마다 박사를 기술 자문으로 모셨습니다. 이때부터 하마다 박사가 이병철 회장의 멘토 역을 한 겁니다. 이런 이유로 하마다 박사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씨앗을 심은 분, 반도체 산업의 길라잡이’라고 하는 겁니다.”
- “이 회장이 당시 하마다 박사를 위해 헬리콥터도 내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 “맞습니다. 하마다 박사가 공장으로 오가는데 불편하지 않게끔 이병철 회장이 전용 헬리콥터를 내어 주셨다고 합니다.”
- “향자씨와 인연은 1988년부터니 34년 인연이네요. 자주 만나셨던가요?”
- “매년 몇번씩 뵈었는데 이번엔 3년 만에 갑니다. 올해 박사님이 우리 나이로 아흔여덟이신데 하루하루 달라지시는 나이이니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만 무척 설렙니다.”
- “향자씨가 하마다 박사 부부를 양부모로 모시듯 두 분도 양딸로 여기시나요?”
- “제가 두 분께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식이 없으니 외롭지 않으십니까?’라고요. 진짜 일초도 망설임 없이 ‘향자가 있어서 너무 이렇게 풍성한 인생이 됐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사실 제가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제게 하마다 박사가 여태 아버지 역할을 해 주신 겁니다.”
- “스물두살 ‘미스 양’에서부터 지금까지 성장해온 과정을 지켜봤으니 두 분도 뿌듯해하시겠네요?”
- “그렇죠. 스물두살 여사원 때부터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 수석연구원, 임원 되는 그 과정을 다 보시고 이후 지금까지 다 지켜보셨으니까요.”
- “하마다 박사가 3년 전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반도체 소재 문제가 생겼을 때 조언을 해주며 도움도 주셨다면서요.”
- “맞습니다. 당시 큰 도움을 주셨죠. 당시 사실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여 하마다 박사가 이 일로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해서요. 그랬더니 ‘향자를 위한 일, 삼성을 위한 일이라면 또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위한 일이라면 나는 죽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고마워서 펑펑 울었습니다.”
이렇게 하마다 박사를 만나러 가는 중에 향자씨에게 ‘비 예보가 있으며 날씨가 추우니 옷을 따뜻하게 입고 오라’는 당부의 메시지가 하마다 박사로부터 왔습니다. 날씨와 옷차림까지 세심히 챙기는 여느 부모와 딸의 대화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마다 박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 떠난 지 27시간 만이었습니다. (공항 검역과 검사에 꽤 많은 시간이 걸린 탓입니다) 그들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으려 한 발치 물러나 그들을 지켜봤습니다.
건강과 안부를 묻고,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는 일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향자씨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고받은 편지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꾸러미엔 향자씨 결혼을 축하하려 하마다 박사 부부가 보낸 축의금 봉투와 편지까지 있었습니다. 향자씨는 무려 30년이 훨씬 지난 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이내 30여 년 전의 시간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하마다 박사 부부는 결혼하는 향자씨에게 당신들이 보낸 축하 편지를 뚫어져라 읽었습니다.
한참 읽은 하마다 여사가 말했습니다.
“제가 이런 명문의 편지를 썼군요. 하하하”
그 바람에 웃음꽃이 활짝 폈습니다.
하마다 여사가 손에 낀 반지를 보여줬습니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향자씨가 선물한 반지였습니다.
닳고 닳은 그 반지에 얽힌 사연을 향자씨가 말했습니다,
- “당시 두 개 합쳐서 만원 정도 하는 반지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반지도 아닌데도 좋아하시며 지금껏 끼고 계시네요. 이젠 닳고 닳아 반지 아랫부분이 끊어질 지경인데도요. 사실 제 손에 낀 반지도 하마다 여사가 주신 겁니다. 받은 게 10여년쯤 전입니다. 사실 이 반지는 하마다 박사님이 친구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하마다 여사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딸에게 물려주고자 고이 간직해왔던 반지를 제게 물려주신 겁니다.”
지켜보니 향자씨가 보낸 사연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고구마 줄기 나오듯 계속 이어졌습니다. 더 지켜만 보다가는 하마다 박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을 것 같아 질문했습니다.
- “향자씨가 처음 두 분을 만났을 때 일본어 실력이 어땠습니까?”
- “하하.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됩니까?”
- “네. 있는 그대로 하셔도 됩니다.”
- “너무나 세심했어요.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끔 모든 걸 다 준비하고 챙겼어요.”
이때 하마다 여사가 말을 끊고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 “계단을 내려오는 데 향자가 제 손을 잡아 주더라고요. 그만큼 향자의 마음이 따뜻했어요.”
그때 잡아 준 손이 여태도 서로를 이어가는 인연의 끈이 된 겁니다. 일본어 실력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듯했습니다. 그들에겐 향자씨가 일본어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나라 반도체의 산업의 씨앗을 심어 준 계기를 하마다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 “제가 기술을 물려준 건 아닙니다. 다른 엔지니어분들이 다 한 거죠. 당시 회사에서 기술 이전을 하는 일이 제 본업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제 직분을 다 했을 뿐입니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한 엔지니어가 서울에 가서 강의했는데 삼성 직원 한 명이 일어서서 강의를 듣더랍니다. ‘앉아서 들어주세요’라고 했더니 너무 졸려서 일어나서 듣겠다고 했답니다. 그때는 남북 간에 사이가 안 좋을 때여서 일하는 사람들도 예비군 훈련을 받은 후 강의받느라 지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서서 강의받을 정도로 열의에 차 있었던 거죠.”
하마다 박사는 당신은 그저 직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삼성 직원의 열정을 은근히 추켜세웠습니다. 잠시 후 그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 “그때는 일본보다 매우 기술이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삼성이 추월했죠. 하늘에 계신 이병철 회장이 지금의 삼성을 보고 흐뭇해하실 겁니다.”
당신이 한 일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았지만, 이병철 회장을 빗댄 말에 당신 또한 흐뭇하다는 속뜻이 읽혔습니다.
이 말을 들은 향자씨가 하마다 박사의 바람을 이야기했습니다.
- “원래 하마다 박사님이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이병철 회장님의 손주인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반도체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만큼 삼성에 대해 애정이 많으신 겁니다.”
최근 향자씨의 딸이 결혼했습니다. 하마다 박사 부부에겐 손녀인 거죠. 그 손녀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두 분께 용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마다 여사가 그 사실을 말하며 자랑스레 그 돈의 용처 또한 밝혔습니다.
- “최근 제 건강이 여의치 않았어요. 이빨 치료에 손녀가 준 돈을 보탰습니다.”
나중에 돌아올 때 향자씨가 여기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습니다.
- “자주 통화하는 데 어느 날 하마다 여사와 통화가 안 되는 거예요. 하마다 박사에게 여쭤봐도 계속 말을 돌리시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하마다 여사가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거예요. 제가 걱정할까 봐 안 알려주신 거죠. 그러고서 나중에 통화하는 데 어눌하게 말이 새는 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 치료하느냐고 여쭤봤죠. 그제야 말씀하시더라고요. 저의 딸이 보내준 돈을 보태서 치료 중이라고….”
하마다 박사가 향자씨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 “처음엔 향자 한 명이 일본에 왔는데, 좀 있다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되었더군요. 하하하”
그렇게 넷이 된 향자씨네와 가족의 정을 나누고 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마다 박사는 향자씨의 딸이 세 살배기 정도일 때 당신의 작은 정원에서 함께 놀며 한국말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가족과 소통하기 위해 한글까지 익혔습니다. 비록 사전을 찾아가며 읽지만, 편지를 읽고 한국의 뉴스를 읽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글을 익힌 데서도 향자씨와 그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읽혔습니다.
서로의 추억을 더듬고, 안부를 염려하는 3년 만의 해후를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길로 가야 할 시간, 향자씨가 연로한 하마다 박사 부부에게 먼저 가시라 간곡히 청했습니다.
하마다 박사 부부는 멀리서 온 향자씨가 먼저 떠나라며 한사코 등 떠밀었습니다.
별수 없이 긴 포옹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며 향자씨가 돌아가야 할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떠나며 온 길을 돌아보니,
아흔여덟살, 아흔여섯살 부부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손을 흔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