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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문화게릴라 독립출판 “폭망 말고 내년에도 살아서 만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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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일러스트레이터스 월.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부착할 수 있다. 서경호 기자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일러스트레이터스 월.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작품을 자유롭게 부착할 수 있다. 서경호 기자

2022 서울국제도서전 현장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종이로 된 책이 전자 미디어를 이긴다.”

지난해 사망한 일본의 유명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20여 년 전 주장이다. 2001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 나온다. 그가 종이책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를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전자기술 발달로 종이책 만들기가 쉬워지고 싸진다. 종이책은 어디든 갖고 다니며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편리하게 읽을 수 있다. 일람성과 속독성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종이책은 사물로서의 매력이 있다. 만져보거나 보는 것만으로 좋은 책이 있다. 사물이어서 소유하는 기쁨도 있다.”

요즘 전자책에 익숙한 이들은 종이책이 더 편하다는 다치바나의 주장에 코웃음을 치겠지만 사물로서의 매력이 있다는 포인트는 여전히 유효한 듯싶다. 분명한 것은 종이책을 내는 출판인들의 어려움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한국과 일본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쉬지 않으면 느린 거북이도 천리”
‘반걸음’ 의미 담아 책 600권 추천

김영하·은희경·한강 강연·토크쇼
페미니즘 등 독립출판 주목 끌어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못 구해도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고발”

순자의 ‘규보불휴 파별천리’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도 관심을 끌었다. 4일 오후 늦게 관객이 적은 틈에 사진을 찍었다. 서경호 기자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도 관심을 끌었다. 4일 오후 늦게 관객이 적은 틈에 사진을 찍었다. 서경호 기자

요즘 출판시장이 궁금해 지난 4일 ‘2022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코로나19로 연기되거나 축소 개최된 서울국제도서전이 코엑스에서 다시 대규모로 열린 것은 3년 만이다. 올해 도서전 주제는 반걸음(蹞步, One Small Step). 가이드북을 보니, 순자(荀子)의 ‘규보불휴 파별천리(蹞步不休 跛鼈千里)’에서 가져왔다. “반걸음으로 걸어도 쉬지 않으면 느린 거북이도 천 리를 갈 수 있다”는 의미란다. ‘파별(跛鼈)’은 원래 ‘절름발이 자라’를 뜻하는데,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맞게 ‘느린 거북이’로 순화해서 표현했다.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 서경호 기자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 서경호 기자

‘반걸음’이라는 도서전 주제를 불평등, 가족·인생·공간, 청소년·청년·교육·노동 등의 5개 키워드로 나눠 보여주는 600권 분량의 북 큐레이션 주제 전시가 묵직했다. 특정 분야를 알기 위해 어떤 책을 왜 봐야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전시 중간중간에 유통·식품·패션·화장품 등 10개 친환경 브랜드가 전시됐다.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상품이 되지 못하고 폐기되는 건강한 농산물을 정기구독 형태로 소비자에게 연결하는 어글리어스 마켓, 의류 재사용과 교환으로 대안적 의생활 문화를 개척하고 있는 다시입다연구소, 채식브랜드 위미트 등이다. 미디어 벤처인 뉴닉이 참여한 게 신기했다. 뉴닉 관계자는 “반걸음이라는 주제에 어울린다며 주최 측이 초청했다”고 했다. 뉴스를 e메일 형식으로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뉴닉이 세상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반걸음을 뗐다고 본 것이다.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 서경호 기자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전시. 서경호 기자

기획전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도 눈길을 끌었다. 최근 3년간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된 30종이 전시됐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크기로 확대된 책들을 보면서 다치바나가 찬미했던 독립된 사물로서의 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주제 강연과 세미나, 토크가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김영하 소설가는 1일 강연에서 소수가 짓지만 다수가 드나드는 상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책을 건축물에 비유했다. “책이라는 건축물은 사용자에 제한이 없다. 한 명이 읽을 수도, 만 명이, 백만 명이 읽을 수도 있다. 건축물은 사람이 너무 많이 오면 받아들일 수 없지만 책은 거부하지 않는다. 책의 특성은 대중성, 보편성에 있다. 이래서 책이 민주주의의 친구였고, 시민혁명의 디딤돌이었다.”

은희경 “문학은 불편한 질문”

지난 1일 3년 만에 코엑스에서 대규모로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 관람객들이 몰렸다. [뉴스1]

지난 1일 3년 만에 코엑스에서 대규모로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 관람객들이 몰렸다. [뉴스1]

올해 초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펴낸 은희경 소설가는 2일 강연에서 ‘문학은 얼어붙은 내면을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를 인용하며 ‘정확하게 보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학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문학은 따뜻한 위로도, 내가 아는 것을 확고하게 만드는 동조자도 아니죠. 불편한 질문을 자꾸 던져서 우릴 불편하게 해요.”

『채식주의자』로 2016년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은 4일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생존자 이야기를 다룬 지난해 출간작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강연했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에 연결돼 있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서 아주 깊이 내려가서 뭔가를 말하면, 읽는 사람이 같이 깊이 내려와서 읽어준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없다면 쓸 수가 없고 문학이 존재할 수가 없다.”

한강 “실낱같은 희망 보면서 써요”

“힘들 때는 어떻게 글을 쓰냐”는 한 청중의 질문에 한강은 답했다. “우울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막연한 낙관은 갖고 있지 않은데 실낱같은 희망은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살아있는 한은, 생명은 언제나 빛을 원하니까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싸우면서 기어가면서 계속 글 쓰는 게 제가 할 일이죠.”

1~5일 닷새간 열린 행사는 끝났지만 서울국제도서전 홈페이지(https://sibf.or.kr)에서 주제 전시인 북 큐레이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은 물론, 일부 강연·세미나도 여전히 감상할 수 있다.

유튜브로 중계하지 않은, 하여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토론회와 강연도 많았다. 특히 4일 ‘시대의 아카이브로서의 책’ 토크가 인상적이었다. 퀴어와 페미니즘에 천착하며 사회와의 연대를 꿈꾸는 여러 독립출판인을 만날 수 있었다.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출판사 전시공간. 서경호 기자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의 출판사 전시공간. 서경호 기자

엄마의 서사로 연대 꿈꾸는 포포포

경북 포항의 정유미 포포포 대표는 ‘엄마의 잠재력을 주목하는’ 포포포 매거진을 6호째 내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웬 종이잡지일까. “촉각, 손맛, 종이 넘기는 소리 등 오감을 작동하게 하잖아요. 더구나 온라인이 발달해도 오프라인에서 줄 수 있는 상호연결성을 대체하지는 못하죠. 서로를 돌보는 연대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어요.”

정 대표는 2019년 여성의 서사에 주목하는 종이잡지를 만들면서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도 꾸리고 있다. 자신처럼 타지에서 일하다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되면서 남편 회사가 있는 포항으로 내려온 ‘지역이주여성’에도 관심이 있다. “엄마도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김지은입니다』 등을 비롯해 낙태·대리모·성매매 등의 굵직한 이슈에 대한 책을 꾸준히 내고 있다. 이두루 봄알람 대표는 “여성의 관점으로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출판사를 한다. 이 대표는 “페미니즘 출판시장의 파이(규모)가 작다”며 “그게 우리 사회의 수준”이라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범죄를 고발한 피해 생존자 김지은씨의 책도 관심은 많이 받았지만 의외로 판매는 부진했다고 한다.

독립 매거진 지원 늘렸으면

성소수자(퀴어) 인권에 주목하는 출판사 ‘움직씨’의 노유다 대표는 ‘가족 내 성폭력’ 생존자의 자전 소설이자 여성 퀴어의 삶을 다룬  『코끼리 가면』 의 저자이다. 노 대표는 자신의 개인사를  밝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장내가 일순 숙연해졌다.

노 대표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사회자 질문에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폭망하지 말고 살아남았으면 합니다. 우리 함께 살아남아요, 살아남아서 내년 도서전에서 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슬픈 얘기를 웃으며 하니, 더 슬프게 들린다.

독립출판사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책을 낸다. 지역이나 특정 커뮤니티와의 연대를 고민하며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의 경계에서 게릴라처럼 움직이며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토론회 이후 독립출판 매대가 모여있는 책마을 장터로 가서 정유미 포포포 대표를 다시 만났다. 업계 분위기를 물었다. “창간호만 내고 사라지는 독립 매거진이 많다. 힘들게 2, 3호를 내는 곳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발행인이 개인 의지로 밀어붙이는 경우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의 정부 지원이 단행본뿐만 아니라 독립 매거진 쪽에도 있었으면 한다.”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 현장에서는 다양한 강연과 토크쇼가 수시로 열렸다. 서경호 기자

4일 서울 코엑스 2022 서울 국제도서전. 현장에서는 다양한 강연과 토크쇼가 수시로 열렸다. 서경호 기자

문학의 쓸모는 무엇인가

같은 날 ‘정치적 올바름과 문학의 실효성’이라는 토론도 지켜봤다.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대”로 시작하는 시인 진은영의 시 ‘오래된 이야기’가 용산 참사에 대한 것임을 양경언 문학평론가의 말을 듣고 알았다. 팽팽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 문학의 쓸모는 뭘까.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고 썼다. 출판도, 책도, 비슷한 운명일까. 마침 사회자인 조강석 연세대 교수가 김현을 인용하며 행사를 마쳤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醜聞)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김현 『한국문학의 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