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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비서수녀 설득…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밥상’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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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지난달 24일 오전 경북 군위군 부계면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한 ‘작은영토’ 식당. 한적한 풍경과 달리 식당 주방은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주방에선 북어와 건새우로 맛을 낸 육수에 된장을 푼 시래깃국이 팔팔 끓고 있었다. 육수는 북어대가리와 다시마, 무, 파, 표고버섯 등을 풍성하게 넣어 빼낸 것이라고 했다.

깊은 맛이 밴 육수에 시래기를 넣은 국뚝배기 옆에서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났다. 뒷산에서 나는 산나물과 부추를 넣어 만든 장떡이 부쳐지는 향이었다. 한 국자씩 뜬 장떡 반죽을 팬에 올릴 때마다 소나기 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부쳐진 장떡은 근처에서 딴 감잎을 위에 얹어 장식했다. 고등어도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졌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작은영토’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한 바보밥상’ 차림. 행복한 바보밥상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즐겨 먹던 음식으로 만든 밥상이다. 김정석 기자

경북 군위군 부계면 ‘작은영토’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한 바보밥상’ 차림. 행복한 바보밥상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즐겨 먹던 음식으로 만든 밥상이다. 김정석 기자

메인 반찬인 장떡과 고등어구이가 만들어지자 소박한 반찬들이 곁들여졌다. 보리등겨로 만든 등겨장, 망초대나물·산나물·뽕잎나물 등 3색 나물, 김치와 마늘종장아찌, 궁채장아찌, 물김치 등이다. 일명 ‘행복한 바보밥상’이 맛깔스럽게 차려졌다.

이날 밥상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즐겨 먹었던 끼니를 재현했다. 김 추기경의 발자취를 찾아 군위군 농업기술센터가 군위를 찾는 천주교 순례객들을 위해 2018년 개발을 시작했다. 김 추기경은 유년시절을 군위에서 보냈으며, 6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밥상은 100년 전 태어난 김 추기경이 생전에 즐겨 먹었던 음식들로 구성됐다. 군위군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밥상 개발에 나선 군위군우리음식연구회 강병숙 회장은 “김 추기경이 생전에 어떤 음식을 자주 먹었는지 기록된 자료가 없어 수소문 끝에 김 추기경을 13년간 모셨던 김성희 유스티나 비서수녀를 찾아갔다”며 “언론과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는 수녀님을 끈질기게 설득해 자문을 얻었다”고 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

고 김수환 추기경

행복한 바보밥상에 오르는 시래깃국은 다진 쇠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것이 특징이다. 치아가 건강하지 못해 시래깃국을 자주 먹었던 김 추기경의 건강과 소화를 고려해 쇠고기를 잘게 다져 넣었다고 한다.

고등어구이는 김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처음 주임신부로 부임한 곳이 경북 안동성당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안동은 간고등어가 유명한 지역이다. 나머지 메뉴도 김 추기경의 성품에 맞게 소박하게 구성했다. 행복한 바보밥상은 김 수녀의 자문을 얻어 2020년 3월 완성됐다.

행복한 바보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은 부계면 내 작은영토, 효령면 내 고지바위권역다목적센터와 본가원 등 세 곳이다. 육수를 푹 끓이는 데 꽤 시간이 걸려 식당을 찾기 전 예약은 필수다.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김 추기경은 교황청이 선정한 ‘신앙의 증인’이자 1969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추기경에 서임된 인물이다.

군위군은 김 추기경이 5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도 군위와의 인연이 나와 있다. “다섯 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 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추기경의 모친이 김 추기경에게 “신부가 돼라”고 한 곳도 군위다.

군위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에 전시된 김 추기경 물품들. 김정석 기자

군위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에 전시된 김 추기경 물품들. 김정석 기자

군위에는 김 추기경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사랑과 나눔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 옆 기념관에서는 격동의 한국 역사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해 노력한 김 추기경의 인생을 살펴볼 수 있다. 2009년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을 남긴 채 선종한 김 추기경의 뜻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념관을 찾는 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부터 김 추기경의 정의감은 남달랐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윤리시험 때 낸 답안이 대표적이다. 그는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해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고 하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화도 그의 성품을 잘 대변해준다. 김 추기경은 1971년 12월 25일 밤 KBS로 중계된 예수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중 작심발언을 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일화도 있다. 그는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전 전 대통령을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는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당시 거액이었던 1000만 원 수표를 보냈다. 김 추기경은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6일(음력 5월 8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탄생일을 기념해 전국 곳곳에서 행사가 준비돼 있다. 서울가톨릭연극협회는 연극 ‘추기경 김수환’을 서울 서강대 메리홀(1~10일)과 대구 범어대성당 드망즈홀(14~15일)에서 공연한다. 범어대성당(7월 13~19일)과 군위 사랑과 나눔공원(7월 20~31일)에서는 ‘탄생 100주년 기념 김수환 추기경 사진전’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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