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한올 한올에 감탄...조계종 최고지도자의 '위풍당당 호랑이'

조계종 최고지도자 성파 스님이 그린 '수기맹호도'. 자다가 깨어나 기지개를 펴고 있는 위풍당당한 호랑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자용의 소장품이었던 '대호도'를 재해석한 그림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이 어려운 여러 상황을 극복하게 힘차게 전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사진 뉴시스]

성파스님이 한지에 옻칠로 그린 '금강전도'.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에 나왔다. [사진 뉴시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 가로 12m, 세로 3m가 넘는 초대형 그림이 걸렸다. 일랑(一浪) 이종상(84) 화백의 1989년 작 '원형상(源型象) 89117-흙에서'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순간을 목도한 듯 황금빛 대지에 푸른빛의 산세와 그 사이에 물이 흐르는 형상을 웅장하게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채색화 특별전 '생의찬미' #재색화 역할에 초점 맞춰 #60여 명 작가 80여 점 #전통, 현대 작품 한자리에

동판 위에 안료를 얹어서 구워내는 동유화 기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총 407개의 패널로 구성됐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소장해오다 지난해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1989년 작가의 개인전 이후 33년만에 처음 공개됐다.

한국의 채색화(彩色畵) 특별전 '생의 찬미'가 지난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최초로 한국 채색화 전반을 재조명하며 19~20세기 초에 그려진 민화와 궁중회화, 현대 창작민화 등 다양한 장르 80여 점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이종상 화백의 이 대작 뿐만 아니라 올해 제 15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된 중봉 성파 대종사의 대형 작품 두 점 등 평소 쉽게 접하지 못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채색화 '역할'에 초점  

이종상, 원형상 8917-흙에서, 동유화, 370x1230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사진 뉴시스]

이숙자, 백두성산, 2000, 2014~2016, 순지에 염채, 227.3x909cm. 작가 소장. [사진 뉴시스]

안성민, 날아오르다, 2022, 아크릴릭, 비닐설치, 250x1000츠, 작가 소장. [사진 뉴시스]

안상수, 문자도 홀려라, 2018, 패널, 캔버스에 유채, 200x194cm, 작가 소장. [사진 이은주]

채색화는 동양화에서 수묵화나 수묵담채화와 달리 채색으로 완성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즐겨 그린 것이 수묵화나 수묵담채화였다면, 말 그대로 색채를 화려하게 쓴 장식화나 궁중기록화, 초상화, 불화(佛畵), 민화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채색화라고 해서 옛 그림만 잔뜩 모아 놓아놓았을 것이라고 예상하면 오산이다. 전시는 민화와 궁중회화, 종교화, 기록화 등을 아우르되 채색화의 재료나 기법 자체보다 '역할'에 주목했다. 왕신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한국 채색화는 우리의 삶과 함께하며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벽사), 복을 불러들이며(길상), 교훈을 전하고(문자도), 중요한 이야기를 역사에 남기는(기록화) 등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며 "채색화가 전통 회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그동안 미술사가 수묵화 중심으로 쓰였다. 채색화의 역할을 들여다보며 한국 미술사의 균형을 바로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벽사(僻邪)'와  '길상(吉祥)', '교훈'과 '감상' 등 네 가지 주제, 6개 섹션으로 나눠 19세기~20세기 초 작품부터 현대 작가들의 조각·미디어·회화·창작 민화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덕분에 관람객은 전통 채색화와 다양한 장르의 현대 작품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가들의 생생한 작업을 엿볼 수 있다.

성파스님이 그린 '수기맹호도' 

성파, 수기맹호도, 2012, 패널에 옻칠, 162x570cm, 작가 소장. [사진 뉴시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가 한국 불교 최초의 '예술가 종정'으로 꼽히는 조계종 종정 성파(83) 대종사(大宗師)의 작품이다. 성파스님은 26차례나 안거(安居)를 완수하며 참선 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서화부터 시작해 도자대장경, 반구대 암각화를 옻칠로 재현한 작품 등을 선보이며 30여 년간 창작해왔다.

이번에 나온 가로 5m 70㎝ 크기 나무판에 옻칠로 제작한 ‘수기맹호도(睡起猛虎圖)’(2012)가 그중 하나다. 민화 연구이 선구자 조자용(1926~2000)의 소장품이었던 민화 ‘대호도’를 재해석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호랑이 모습을 표현한 이 그림은 금방이라도 화폭을 찢고 다가올 듯이 생동감이 넘친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정밀하게 표현된 털 한 올 한 올이 탄성을 자아낸다.

10폭 병풍의 채색 ‘금강전도’(2012, 9mx2.2m)도 있다. 한지에 옻칠로 그린 것으로, 금강산 곳곳의 명승지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불교적 의미까지 담고 있다. 왕 학예사는 "높은 경지의 보살과 그 설법을 듣고자 하는 대중들의 다양한 모습을 봉우리 형태로 표현해 불교적 수행과 정진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이숙자(80) 작가의 '백두성산'(2020)도 주목할 작품이다.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듯 백두산을 양쪽으로 해와 달을 거느린 영산(靈山)으로 표현했다. '보리밭 화가'로 유명한 이 작가는 백두산 그림에 장엄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오방색' 책가도'의 현대적 해석 

이정교, 사·방·호, 2022, 자작나무 합판에 채색, 800x800x235cm. [사진 뉴시스]

작자미상, 매화 책거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18x292cm, 개인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문선영, '컬러피아'의 한 부분. 2021, 자개, 종이에 채색, 작가소장. [사진 이은주]

이 밖에도 전시는 처용을 주제로 한 스톤 존스턴 감독의 영상 '승화'부터 안성민의 '날아오르다' '신상호'의 조각 '토템상', 홍지윤의 '접시꽃 들판에 서서' , 김종학의 '현대 모란도', 박대성의 '반구대소견' 등이 흥미진진하다.

전통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두 개의 설치작품도 매력적이다. 이정교의 '사·방·호'(2022)는 오방색의 픽셀과 여러 종류의 호랑이 이미지에서 가져온 도상을 역동적으로 결합했고, '오색사이'는 재활용 쓰레기 등 버려진 것들의 이미지를 변형하고 분할해 우아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 꼼꼼하게 들여다볼수록 큰 재미를 선사하는 게 바로 다양한 책거리 그림이다. 가로 3m에 달하는 '매화 책거리도'는 8폭 병풍으로 매화가 화면을 가로지르는 형식으로 파격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오방색을 주제로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작업한 문선영의 '컬러피아 3,4,5' (자개, 종이에 채색), 붙박이 책장 사진을 한지에 출력한 후 각 화면을 손바느질로 엮어 완성한 임수식의 '책가도 33'(2014)도 주목할 만하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