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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한국인이 처음 그린 미국 풍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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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화가 강진희(1851~1919)의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한국인이 그린 첫 미국 풍경화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 [사진 예화랑]

서화가 강진희(1851~1919)의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한국인이 그린 첫 미국 풍경화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 [사진 예화랑]

강진희의 1888년작 ‘화차분별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수행·통역
자주·실리외교의 중요성 일깨워

보면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서울 강남 예화랑에서 전시 중인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다. 화차는 석탄을 태워 달리는 기차. 가로 34㎝, 세로 28㎝ 화폭에 철교를 달리는 기차가 등장한다. 철로도 두 개, 기차도 두 대다. 그림 하단에는 서양풍 5층 건물과 나무 많은 언덕이 보인다. 한국인 화가가 최초로 그린 미국 풍경화로, 이번에 처음 일반 공개됐다.
 화가는 청운 강진희(1851~1919). 1888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수행·통역원으로 따라간 미국에서 본 풍경을 담았다. 갓 쓰고 도포 입은 그에게 드넓은 강물을 가로지르는 철교는 대단한 구경거리였을 터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1899년 개통했다.
 ‘화차분별도’는 무엇을 그린 것일까. 강진희가 기록을 남기지 않아 명확한 정설은 없다. 다만 박정양의 『미행일기(美行日記)』 에 워싱턴공사관 일행이 1888년 4월 1일 기차를 타고 볼티모어 당일 여행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려서 한쪽 눈을 돌리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잘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의문이다. 당시 미국엔 대형 철교 두 개가 나란히 놓인 게 없었다. 세계 첫 철제 교각인 뉴욕 브루클린 다리는 1883년 개통됐고, 그것과 쌍둥이 다리로 불리는 맨해튼 다리는 1909년 완공됐다. 박정양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게 1887년 12월 28일이고, 다시 미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에 내린 게 1888년 1월 11일이니 샌프란시스코 명물 금문교(1937년 개통)일 가능성도 전혀 없다. ‘화차분별도’는 실경산수가 아닌 작가가 여기저기서 본 장면을 조합한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분별도(分別圖)’란 명칭도 미스터리다. 뭘 구별하고 가른다는 뜻일까. 전기작가 이충렬과 역사학자 노관범과 함께 머리를 맞댔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분별도 이름이 붙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노관범),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게 물어도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더라”(이충렬).

강진희의 ‘잔교송별도(棧橋送別圖)’.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헤어지는 장면을 그렸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사진 예화랑]

강진희의 ‘잔교송별도(棧橋送別圖)’.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헤어지는 장면을 그렸다.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사진 예화랑]

 전시장에 있는 강진희의 다른 작품 ‘잔교송별도(棧橋送別圖)’에서 실마리를 찾아봤다. 강진희가 조선에 예정보다 일찍 소환된 박정양과 부둣가에서 헤어지는 모습이다. “분별 또한 송별처럼 자기보다 먼저 기차를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박정양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요”(이충렬), “그럼 뜻이 통하네요. 여행을 잘했다면 굳이 분별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 같아요.”(노관범)
 물론 위의 대화는 추정이다. 그럼에도 박정양이 조선에 소환된 이유가 쓰라리다. 박정양이 미국에서 펼친 독립적 외교활동에 불만을 느낀 청나라가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귀국을 요구했다. 영약삼단은 세 가지 별도 약정이란 뜻으로, 당시 청나라는 박정양의 미국 파견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조선의 자주국 표방 금지와 중국의 속국임을 알려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심지어 한국 공사와 중국 대신의 상하관계를 강요할 정도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6년 만에 공사를 보내며 자주 국가 면모를 갖추려는 조선을 방해하려 했다. 134년 전의 두 그림이 미·중 격돌의 오늘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화차분별도’는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간송미술관에서도 전시된 적이 없다. 『간송 전형필』을 낸 이충렬 작가는 “간송이 이 그림을 구입한 경위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간송은 왜 이 작품을 사들였을까.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으로 판단했을까. 추측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간송 덕분에 한국 근대외교사의 한 고리를 찾았다는 사실. 그 고리를 이어가며 현재의 위기를 타고 넘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더욱이 지금은 미국 대통령이 BTS를 백악관에 초청하는 시대, 134년 전 기차가 무색할 뿐이다. 오늘 현충일을 맞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