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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손흥민 응원 안해?"…새벽 해수욕장 1200명 떼창, 무슨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예요. 걸어가세요, 계속 걸어가세요. (You will never walk alone. Walk on, walk on)”
지난달 29일 오전 6시쯤 강원도 양양군 물치 해수욕장. 대형 스피커로 느린 템포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떼창’이 시작됐다. 2021~22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리버풀이 레알 마드리드에 0-1로 패배한 직후였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청중들은 한목소리로 리버풀의 응원가인 ‘You will never walk alone’을 따라불렀다. 손엔 리버풀의 우승을 기원하는 머플러가 들려있었다. 리버풀 문양이 그려진 대형 깃발을 흔드는 이도 보였다. 음악이 멎자 이들은 축구 중계가 흘러나오는 전광판을 향해 힘껏 손뼉을 쳤다. 리버풀 주장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이모(29)씨는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 선수와 새벽을 불사른 우리를 위한 박수였다”며 웃었다.

[르포]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양양 ‘단관’ 체험기

지난달 29일 강원도 양양군 물치해수욕장에서 축구팬들이 리버풀이 승리하길 바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물치해수욕장은 1200여명의 축구팬으로 가득찼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도 양양군 물치해수욕장에서 축구팬들이 리버풀이 승리하길 바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물치해수욕장은 1200여명의 축구팬으로 가득찼다. 심석용 기자

이날 새벽 기자가 찾은 물치 해수욕장은 결승전이 펼쳐진 프랑스의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해수욕장을 축구장 못지않은 공간으로 만든 주인공은 양양 출신 리버풀 팬 김성민(37)씨다. 서울에서 스포츠 펍을 운영하는 그는 3주 전부터 단체관람 행사를 준비해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어려웠던 자신과 응원이 제한됐던 축구 팬을 위한 축제를 만들겠단 마음이었다고 한다. 양양군과 어촌계가 협조하면서 ‘무박 2일’의 축제가 성사됐다.

해수욕장 가득 메운 1200여명 함성 

파도 소리만 들리던 한밤의 해수욕장은 자정 무렵 축구 팬들을 실은 셔틀버스가 하나둘 도착하면서 북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차장 끝까지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섰다. 리버풀 유니폼을 입은 20·30세대 콥(Kop·리버풀 팬)이 대부분이었지만 타팀 유니폼을 입은 팬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현지사정으로 경기가 1시간 가까이 지연됐지만, 응원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모인 축구 팬 1200여명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환호와 절규의 순간을 함께했다.

지난달 29일 양양물치해변 행사에서 첼시FC 팬 엄영석(22·오른쪽)씨가 리버풀 팬 친구와 함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했다고 한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9일 양양물치해변 행사에서 첼시FC 팬 엄영석(22·오른쪽)씨가 리버풀 팬 친구와 함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그는 이날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했다고 한다. 심석용 기자

긴 밤을 함께 지새운 팬들은 미소를 지으며 저마다 리버풀과의 인연을 털어놓았다. 대전에서 왔다는 심재철(28)씨는 “15년간 지켜본 리버풀은 늘 포기하지 않고 극적인 승부를 만들어내는 팀이었다”며 “친구들은 박지성의 맨유와 손흥민의 토트넘을 응원했지만, 나에겐 리버풀의 열정이 더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8일 리버풀 대 토트넘 경기에서도 손흥민의 득점보단 리버풀의 승리를 바랐다고 했다. “리버풀은 주말을 마무리하는 ‘개그콘서트’ 같은, 승패와 관계없이 찾게 되는 존재였다”는 게 그의 말이다.

8년 차 리버풀 팬인 이상호(27)씨는 “암흑기 시절 리버풀 주장이 팀원을 독려하는 모습에 매료됐다”며 “리버풀은 취준생 시절 힘겹고 단조롭던 일상에 한 줄기 빛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가 잘됐으면 좋겠지만, 그게 응원하는 팀을 고르는 조건은 아니다”라면서 “오랜 시간 관심을 보인 팀이 우승하는 게 더 기쁘다”라며 머플러를 흔들어 보였다.

“마동석 나온다고 ‘캡틴’ 버릴 순 없지 않나”

지난달 29일 강원도 양양군 물치해수욕장에서 축구팬들이 리버풀이 승리하길 바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물치해수욕장은 1200여명의 축구팬으로 가득찼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9일 강원도 양양군 물치해수욕장에서 축구팬들이 리버풀이 승리하길 바라며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이날 물치해수욕장은 1200여명의 축구팬으로 가득찼다. 심석용 기자

이들은 리버풀팬이 한국에선 소수 취향이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 축구 팬이 대부분 국가대표팀만 응원하는 점, 리버풀에 한국인 선수가 없는 점 등 때문에 국내 리버풀팬들은 상대적으로 ‘마니아’층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한때 온라인상에선 한국인이 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토트넘이 다른 팀과 경기를 할 때 타팀을 응원하는 이들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난달 29일 리버풀팬들은 종이에 적힌 현지 응원가 가사를 따라 부르며 리버풀을 응원했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29일 리버풀팬들은 종이에 적힌 현지 응원가 가사를 따라 부르며 리버풀을 응원했다. 심석용 기자

김성민씨는 마블 캐릭터를 비유로 들었다. 그는 “마블 캐릭터, 그중에서도 캡틴 아메리카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마동석이 연기한 길가메시란 캐릭터를 더 좋아하라 강요할 수 없지 않냐”며 “다만 길가메시의 인기가 높아지면 마블 영화의 저변이 확대될 순 있다. 우리가 손흥민의 선전을 기원하는 건 그런 맥락도 있다”고 말했다. 손흥민이 잘 되길 바라지만 그게 꼭 한국인이라서만은 아니라는 취지다. 리버풀 출신 영국인 제이크 페인스(35)는 “해외 젊은 축구 팬 중에서도 고향 팀을 응원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서 “손흥민이 리그에서 득점왕을 하면 좋지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더 잘하길 바라는 건 요새 축구 팬들에겐 어색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취향을 드러내면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정받으려는 MZ세대의 특성이 스며든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MZ세대 사이에선 메달과 관계없이 올림픽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면서 “클럽 축구에서도 꼭 한국 선수가 뛰는 팀만 응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손흥민이 인기 있는 이유는 단순히 내셔널리즘 때문만이 아니다”라면서 “리버풀 등 해외 축구팀을 응원한다고 자신 있게 드러내는 이들도 자신의 취향을 중시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MZ세대의 대표적인 특성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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