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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석기시대의 교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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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호 30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는 눈 깜짝할 새라는데 그보다 더 빠른 새가 있으니 바로 어느새란다. 물리적 시간이야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게 훨씬 더 짧겠지만 심리적 체감 속도는 어느새를 능가할 만한 게 없다는 뜻이렷다. “어?” 하는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될 때의 당혹감은 그만큼 순간적이면서도 강렬하다. 그런데 이런 난센스 퀴즈보다 더 난센스 같은 현실과 마주하게 된 곳이 있으니 바로 더불어민주당이다.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까지 패하면서 중앙과 지방 권력을 모두 내주게 되면서다. 민주당이 ‘어느새’ 이 지경이 됐는지, 말 그대로 권불십년에 화무십일홍이 따로 없다.

참패는 이미 예견돼 있었다. 대선 패배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참회도 없었고, 이를 극복할 전략과 의지도 없었으며, 치열한 토론을 통해 미래 비전 하나 내놓지 못한 ‘3무 정당’의 승리는 애당초 언감생심이었다. 더 큰 문제는 좀처럼 반등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능력은 없지만 계파의 연장자라는 위치만으로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일부 중진들, 진보의 옷을 입었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기득권에 심취해 있는 현역 의원들, 오랜 여당 생활로 초심은 물론 야성마저 상실한 ‘직업 정치인’들까지. 임진왜란 때 서양 선교사가 조선 군대를 가리켜 “성안에선 호랑이인데 들판에선 양떼”라고 꼬집었는데 지금의 민주당이 딱 그 모양 그 꼴인 형국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민주당의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

비대위는 또 어떤가. 도대체 비상시국이 몇 달째인가. 대선 직후 다섯 달을 당대표 없이 방치하는 게 국회 제1당이 할 일인가. 지방선거 당일까지 비상 체제의 긴장감을 유지한 당직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됐겠는가. 그러고도 국민에겐 ‘비상한’ 관심을 보여 달라고 호소했단 말인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지고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진 비대위는 앞으로 다시는 만들지 마라. 차라리 직무대행 체제로 가든지 곧장 새 대표를 선출해 ‘정상적’ 체제를 갖추는 게 순리다. 양치기 소년도 아닌 양치기 꼰대 아저씨들의 습관성·면피성 비대위 도돌이표는 식상함을 넘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정작 본인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혁신위 얘기도 나오는데 혁신·쇄신이란 단어도 민주당에선 한계 효용의 마지노선을 넘은 지 한참 됐다. 그렇게 또 임시방편으로 땜질식 처방만 내놓을 생각 말고 오히려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충분한 고민과 자문을 거친 뒤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때다. 아인슈타인이 “내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55분은 문제를 정의하는 데 쓰고 나머지 5분간 문제를 풀겠다”고 한 것도 해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나무를 베는 데 8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칼을 가는 데 6시간을 쓸 것”이란 링컨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낙타는 땡볕에 노출되면 오히려 얼굴을 햇볕 쪽으로 향한다. 해를 피하려 등을 돌리면 몸통의 넓은 부위가 뜨거워져 견딜 수 없게 되지만 해를 마주하면 얼굴은 화끈거려도 몸통엔 그늘이 만들어지면서 힘을 비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사막 한가운데 고립된 낙타 같은 신세다. 당장의 고통을 감내하고 땡볕을 향해 정면으로 나아갈지, 몸통인 지지자들이 힘들어하든 말든 나부터 편하고 보자며 몸통 뒤로 얼굴을 숨길지 선택할 순간이다.

석기시대는 돌이 부족해 끝난 게 아니다. 청동기·철기시대를 지나 이미 나노 시대에 진입했는데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 철 지난 이데올로기의 돌과 빛바랜 과거의 훈장만 좌판에 깔아 놓고 최고의 상품이라 우기고 있으니 누가 관심이나 갖겠는가. 시대는 ‘진보’했는데 당은 오히려 ‘퇴보’만 거듭하고 있으니 “미워도 다시 한번 찍었다”는 지지자들의 SNS 인증샷이 무색할 따름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페이스북 글에 쏟아진 네티즌들의 호응은 민주당을 향한 최후의 경고다. 이젠 유권자도 두 번은 속지 않는다. 민주당의 위기는 지금부터. 고난의 행군도 이제 시작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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