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호에 손흥민 있었다면, 독일 꺾고 결승 갔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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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달 31일 풋볼 팬타지움에서 열린 2002 월드컵 2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당시 비화를 설명했다. 정준희 기자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난달 31일 풋볼 팬타지움에서 열린 2002 월드컵 2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당시 비화를 설명했다. 정준희 기자

2002년 6월 4일 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6월의 광란’은 시작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에서 대한민국은 폴란드를 2-0으로 꺾고 월드컵 본선 첫 승리를 거뒀다. 유럽 강호 포르투갈마저 1-0으로 누르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 한국은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골든골, 스페인전 승부차기 승리로 4강에 올랐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 20주년을 맞아 6월에는 세계 최강 브라질을 시작으로 4개국과 친선 A매치가 열린다. 2002 월드컵의 밑그림을 그리고 히딩크 감독 영입 등 4강 신화의 토대를 쌓은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만났다. 그는 2002년 당시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대표팀의 브레인 역할을 했다.

인터뷰는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내 풋볼 팬타지움에서 진행됐다. 2002 월드컵 기념관에서 국내 최초의 축구 테마파크로 진화한 팬타지움에서는 49명의 작가가 참여한 ‘2 BE CONTINUED: 끝나지 않은 신화’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히딩크 감독과 23명 태극전사를 그린 작품 앞에 선 이 부회장은 “그날의 함성이 떠올라 가슴이 뛴다. 20년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 축구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다시 도약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동국, 히딩크와 궁합 안맞아 탈락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과 팀 전술을 의논하는 이용수 기술위원장. [중앙포토]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과 팀 전술을 의논하는 이용수 기술위원장. [중앙포토]

2002년 월드컵 앞두고 기술위원장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월드컵을 앞두고 청와대 주최 월드컵 지원회의가 열렸습니다. 구석에 앉아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오자마자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어디 있습니까’ 라고 찾으셨어요. 깜짝 놀라서 일어서니까 ‘우리 16강 가는 겁니까. 16강 갈 확률이 몇 퍼센트입니까’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제가 ‘IMF로 어려운 상황에서 경기장 10개를 새로 짓고, 일본과 경쟁하면서 공동개최를 하는데 16강 가는 것은 확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 국민이 우리 국가대표팀에 내리는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씀드렸죠.”
그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습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월드컵 16강 이상 올라가 본 경험을 가진 감독을 모셔오는 것이었죠. 1순위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팀 에메 자케 감독이었고, 2순위가 이 대회 4강에 올랐던 네덜란드의 히딩크였습니다. 자케가 고사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히딩크에게 공을 들였고, 가삼현(한국조선해양 부회장) 당시 축구협회 국제부장이 현장에서 영입 작전을 지휘했죠.”
히딩크 부임 초기에는 프랑스·체코에 0-5로 참패하며 ‘오대영’이라는 별명도 붙었죠.
“히딩크의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23명 선발한 선수를 데리고 원정을 갑니다. 최상위 팀을 상대로 그 팀이 가장 좋은 상태일 때 경기를 하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선수들이 성장하고, 또 원정 경기의 불리함을 겪으면서 홈에서 경기 하는 게 얼마나 이점이 많은지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선수 선발 과정이 엄청나게 치열했다면서요?
“히딩크와 박항서 코치, 핌 베어벡과 정해성 코치 이렇게 팀을 나눠 같은 경기장에서 같은 선수를 보고 와서도 의견이 너무 달랐어요. 옆에서 듣고 있으면 진짜 싸우겠다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토론했죠. ‘A가 괜찮다’고 누가 말하면 ‘무슨 소리냐. 걔는 잊어버려라’고 대응을 합니다. 가장 큰 원칙은 ‘정신력이 강한 선수’였어요. 우리 조별예선 3경기가 모두 5만 이상을 수용하는 종합경기장이었죠. 홈 관중의 엄청난 응원을 받을 텐데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실수해도 털고 일어날 정신력이 없는 선수는 절대 기용할 수 없다고 히딩크는 강조했습니다.”
2002 멤버 중 가장 아까운 탈락자는?
“우리 공격수 중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선수는 안정환이었습니다. 슈팅이 기가 막혔어요. 스트라이커 포지션에는 황선홍·최용수가 있고, 설기현도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는 이동국 선수를 많이 응원했습니다만 결국 선발되지 못했죠.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선호하는 히딩크 감독과 궁합이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카타르 월드컵 현실적 목표는 16강

즐거운 상상을 해 보자고 제안했다. 만약 2002 멤버에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손흥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부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암에서 열린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을 겁니다. 그리고 독일을 꺾고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로 갔겠죠. 결승 상대가 브라질인데, 당시 전력과 손흥민의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면 충분히 해볼 만 했다고 봅니다.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중앙UCN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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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는 손흥민을 어떻게 활용했을까요.
“손흥민은 측면에서 파괴력이 큰 선수죠. 히딩크는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손흥민을 3-4-3 포메이션의 왼쪽 또는 오른쪽 공격수 자리에 놓되 중앙 원톱보다 적진에 더 깊숙이 침투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역할을 줬을 겁니다. 손흥민의 폭발력을 극대화하고, 수비가 손흥민에게 몰릴 때 우리는 미드필드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거죠.”
첫 경기 폴란드전이 열린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이 새빨갛게 물들었죠.
“2002년 1월에 한 언론사 초청 방담 자리에서 붉은악마 김정연 팀장을 만났어요. ‘우리 홈인데 붉은악마 응원 따로, 관중석 응원 따로 하면 홈 이점이 전혀 없게 된다. 노래든 구호든 누구나 쉽게 따라 하고 모두가 하나될 수 있는 응원을 준비해 달라’고 당부했어요. 부산 아시아드에 딱 들어갔는데 온통 붉은 물결에 모든 관중이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는데 소름이 돋더라고요.”
포르투갈 2명 퇴장, 이탈리아 토티 퇴장 등 우리가 좀 심하게 홈 이점을 누렸다는 말도 있는데요.
“판정은 심판이 하는 거고요. 우리는 전술적으로 준비를 잘 했어요. 이탈리아전 앞두고 히딩크는 ‘이탈리아 선수는 팔을 많이 쓰는데 관중석에선 잘 안 보인다. 그런 동작이 나오면 강력하게 항의하라’고 지시했어요. 실제로 토티가 김태영·최진철에게 팔꿈치를 쓸 때마다 주장 홍명보가 강하게 어필했고, 옐로카드 두 장이 나와서 토티가 퇴장당한 거죠.”
2002 4강 신화가 한국 축구에 남긴 유산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에만 나가면 우리 선수들이 가진 것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탈락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2002 4강 경험은 우리가 어느 국제대회를 가도 역량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감의 토대가 됐습니다. 또 하나는 세계 최고 수준과의 격차가 없어지고 선진 축구 기술이나 전술을 시차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4강 신화가 한국 사회에 남긴 유산은?
“저는 축구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고, 축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축구는 영욕의 우리 근현대사와 늘 함께하며 희망과 용기, 하나됨을 만들어 왔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은 대한민국이 기술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톱으로 갈 수 있는 저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K-팝, K-컬처 등의 융성은 2002년 4강 신화의 에너지와 맥이 닿아 있다고 봅니다.”

이 부회장은 최근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장 자리에 위촉됐다. 2002 기술위원장이 20년 세월을 뛰어넘어 2022년 월드컵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 부회장은 카타르 월드컵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축구 문화나 저변, 잠재력 등을 고려했을 때 조별예선 통과가 가장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물론 16강부터는 모든 경기가 단판승부니까 누구도 승부를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대 출신 K리거 “태극기 대신 태각기 달았죠”

1984년 프로축구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 창단멤버로 뛸 당시의 이용수. [사진 이용수]

1984년 프로축구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 창단멤버로 뛸 당시의 이용수. [사진 이용수]

이용수 부회장은 서울체고-서울대를 나왔다. 한때 방송 3사 축구 해설위원(KBS 이용수, MBC 신문선, SBS 강신우)이 모두 서울체고 출신이었다. 이용수는 ‘캐넌슈터’ 황보관 등과 함께 ‘서울대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축구부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죠”라고 회고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이용수는 해병대-상업은행을 거쳐 1984년에 FC 서울의 전신인 럭키금성 창단멤버로 입단했다. K리그 통산 35경기에 출전해 8골·2도움을 기록했다. 이 부회장은 “당시 조광래·허정무·박창선 같은 쟁쟁한 선배에게 밀려 ‘태극기’(국가대표)는 달지 못했어요. 대신 실업선발로 메르데카배 등 동남아 대회에 출전했으니 ‘태각기’는 달았다고 해야죠”라며 웃었다.

이 부회장은 은퇴 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오리건주립대에서 스포츠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분하면서도 핵심을 짚는 축구 해설로 인기가 높았고, 세종대에서 후학도 키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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