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신대륙 간 것도 그 때문? 발칸까지 호령한 '정복왕'[BOOK]

중앙일보

입력 2022.06.03 14:00

술탄 셀림

앨런 미카일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이슬람 군주) 셀림 1세(1470~1520, 재위 1512~1520)는 튀르크어로 야부즈(정복왕)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예일대 역사학 교수로 오스만 제국 중심의 중동사 전문가인 지은이에 따르면, 단순히 정복이라는 말로 업적을 요약하고 세계사에 남긴 영향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유로센트리즘(유럽중심주의)이 아닌 객관적 시각으로 오스만제국과 셀림 1세, 그리고 글로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교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셀림 1세는 8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중 발칸에서 중동까지 광범위하게 정복했지만 중요한 건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가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슬람 세계의 순례지인 메카와 메디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다.

과녁을 맞히는 셀림. 16세기 필사본 역사서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사진 책과함께]

과녁을 맞히는 셀림. 16세기 필사본 역사서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사진 책과함께]

 267년을 이어오던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시 무슬림 세계의 문화·경제·군사 중심지인 이집트를 점령한 것도 업적이다. 맘루크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인 알아바스가 창시한 아바스 왕조의 후손을 보호하면서 그 가문이 소유했던 이슬람 세계 최고의 정치·종교 지도자 호칭인 '칼리파'를 쓸 수 있었다. 맘루크를 무너뜨린 셀림 1세는 칼리프 호칭도 승계하면서 군사력·경제력·문화력과 함께 이슬람 세계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도 함께 확보했다.

 그의 정복 활동은 유럽 세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 중동을 손에 넣으면서 유럽에서 동양으로 가는 무역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동·서양의 역사 해석이 엇갈린다.
 따져보자. 서구에선 흔히 1492년을 역사의 변곡점으로 친다. 유럽인이 세계 지배에 본격적으로 나선 해로 보기 때문이다. 첫째, 711년부터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던 무슬림 세력이 그라나다에서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을 뒤로하고 북아프리카로 밀려났다.

 둘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 부부의 지원을 얻어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항해에 나섰다. 닿은 곳은 신대륙이었지만 말이다.

 셋째,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내쫓은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종하든지 떠나도록 명령했다. 이들이 떠나느라 배를 구할 수 없었던 콜럼버스는 출발 시기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받아주는 유럽 신교도 국가는 물론 오스만튀르크 등으로 이주해 경제 활동의 장을 넓혔다.

16세기 그림. 크림반도에서 타타르족의 지도자 멩글리 기라이를 만나는 셀림. [사진 책과함께]

16세기 그림. 크림반도에서 타타르족의 지도자 멩글리 기라이를 만나는 셀림. [사진 책과함께]

 하지만 무슬림 또는 튀르크 버전의 역사는 이와 다르다. 기독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기독교도들의 용어로 재정복을 뜻하는 레콩키스타)했지만,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근동지역과 이집트를 정복했다. 막강한 군사력의 오스만이 가로막았기 때문에 수많은 유럽 국가의 상인과 선원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이라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콜럼버스 등이 대항해 시대를 열고 신대륙 개척에 나선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공할 오스만 제국을 우회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에 호의적인 동양의 대칸을 개종시켜 오스만을 협공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점령 또는 수복을 위한 글로벌 기독교 동맹이다. 콜럼버스는 이런 생각을 가슴에 품은 마타모로스, 즉 ‘무어인(무슬림)을 죽이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인도로 오해받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다른 유럽인들도 생각은 매한가지였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711년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을 때 일곱 주교가 바다로 탈출해 시볼라 섬에 일곱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도 콜럼버스를 비롯한 모험가들을 자극했다. 이 도시는 기독교인들이 들고나온 황금으로 지어졌다. 여기에 간다면 예루살렘을 되찾을 군자금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그 자신에겐 또 다른 십자군 운동이었던 셈이다.

고문들과 함께인 셀림. 16세기말에 그려진 그림이다. [사진 책과함께]

고문들과 함께인 셀림. 16세기말에 그려진 그림이다. [사진 책과함께]

 지은이는 셀림 1세의 세계사적인 영향력에 주목한다. 지은이는 유럽의 신대륙 개척은 물론 종교개혁, 시아파와 수니파의 치열한 경쟁, 첫 글로벌 상품인 커피의 개발과 커피 자본주의의 확산도 그의 치세에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셀림 1세가 군사력만 강했던 오스만을 결정적으로 탈바꿈시켜 전략적인 정복과 타협으로 세계적 강국으로 만들고 세계사를 주도해 근대 세계의 문을 연 주인공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닦은 오스만은 1600년 무렵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그 뒤로도 300년 동안 중동 최대의 패권세력으로 남았다. 오스만은 기나긴 수명과 함께 세계사의 중심 역할을 지속했다. 유럽은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 이후 글로벌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뿐이라는 게 지은이의 강조점이다. 유로센트리즘에 메몰되지 말고 잃어버린 세계 패권사 300년을 오스만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울림을 준다. 서구나 강대국 중심이 아닌 역사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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