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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김동연, 있는 자리 흩트려서 금기를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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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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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경기지사 선거 얘기다.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초박빙 접전을 벌인 끝에 0.15%포인트 차이로 김은혜 국민의 힘 후보를 꺾었다. 국민이 완패를 당한 민주당에 그래도 ‘까치밥’은 남겼다는, 개표방송에 출연한 어느 전문가의 논평이 귀에 쏙 들어왔다.

민주당에 ‘까치밥’ 남긴 대역전극 #책에 쓴 대로 실천하면 성공할 것 #진영논리 끊임없이 흩트려줬으면

현장 기자 시절에 경제관료 김동연을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경기도 선거를 관심 있게 봤다. 이재명 후보의 민주당 텃밭 보궐선거 출마와 김포공항 이전론 탓에 민심이 흔들렸다. 방송토론회에서도 정책전문가 김동연의 장기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메시지 전달력은 방송기자 출신인 김은혜 후보에 밀렸고, 토론회도 정책 대결보다는 흠집잡기 공방으로 흘러갔다. 유세 막판에 “여러분의 한 표가 너무나 간절하고 절실하다”며 울먹일 정도로 쉽지 않은 선거였다. 그럼에도 대역전극에 성공한 건 일꾼을 뽑자는 그의 인물론이 먹혔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동연은 어떤 사람일까.

개표 막판 극적으로 역전하며 승리한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2일 새벽 경기 수원 팔달구 선거사무소 개표상황실에서 축하를 받고 있다./20220602/김경록 기자

개표 막판 극적으로 역전하며 승리한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2일 새벽 경기 수원 팔달구 선거사무소 개표상황실에서 축하를 받고 있다./20220602/김경록 기자

그가 지난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대선에 뛰어들었을 때, 여론조사에조차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지지세가 미약할 때, 주변에서 많이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김동연 후보는 대체 뭐하러 나왔느냐”는 질문을 내게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가 쓴 책 보면 다 나온다”고 했다.

김동연이 쓴 책은 2017년 아주대 총장 막바지에 출간한 『있는 자리 흩트리기』와 지난해 대선 출마 직전에 낸 『대한민국 금기 깨기』이다. 전자는 흙수저로 잘 알려진 그의 신산스러웠던 삶과 국무조정실장까지의 공무원 경험이 녹아있는 자서전이자 인생론 같은 책이다. “결핍을 두려워하지 마라” “낯선 길, 익숙하지 않은 길로 가라” “시간과의 싸움에 치열하게 몸을 던져보라” 등 잠언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다. 후자는 대선 출마선언문 성격이다. 대선을 염두에 두고 썼던 책의 일부 내용은 경기지사 공약과 배치되기도 했다. ‘수도권 올인 구조를 뒤집자’며 3기 수도권 신도시 개발, 수도권 광역교통정책에 반대하고 수도권보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공공투자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썼는데, 설마 경기지사에 출마하게 될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기획재정부 2차관 김동연은 19대 총선을 며칠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내놓은 복지공약 266개를 모두 집행하려면 기존 복지예산 92조6000억원 외에 5년간 최소 268조원이 더 필요하다는 정부 추계 발표를 주도했다. 여야, 특히 지금 민주당인 야당 반발이 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명시한 공직선거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고 선거법 준수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주의 공문을 발송했다. 결국 기재부는 “아쉽지만 선관위 결정을 존중한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맞서 재정당국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게 본연의 역할”이라는 기재부 내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튼 논란의 당사자였던 김동연은 주눅 들지 않았다.

이번 선거 공약인 GTX A·B·C 노선 연장과 D·E·F 노선 신설이나 청년과 신혼부부를 위한 반값 아파트 등에는 중앙정부의 협조와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경제관료 시절의 원칙과 결기를 정치신인 경기지사가 얼마나 조화롭게 지켜낼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내가 처한 환경,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이라는) 있는 자리를 흩트려야 한다.(중략)있는 자리가 안전하고 여유로워졌을 때는 일부러라도 그 자리를 흩트려야 한다. ‘있는 자리 흩트리기’는 인생의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용기를, 자리가 공고해졌거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스스로 경계하는 지혜를 줄 것이다.”(『있는 자리 흩트리기』)

짜릿한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게 용기일지, 지혜일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용기든 지혜든 얻기 위해선 그 자리를 끊임없이 흩트려야 한다는 거다. 이젠 고질병이 돼버린 정치권의 진영논리와 편 가르기 구태를 좀 흩트려줬으면 한다. 추격만 하는 한국 경제, 계층 사다리 막는 세습 경제와 같은 우리 미래의 발목을 잡는 금기도 그가 꿈꾸는 기회복지국가를 위해 꼭 깨기를 바란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책 속의 구절을 기억한다. 정치적 지위나 자리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하고 어떤 정치인이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책에 쓴 대로 실천하면 성공할 것이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의미 있는 패배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신인 김동연이 자신의 책에 쓴 대로 동사형 꿈을 이루기 바란다. 책에는 주옥같은 내용이 많다. 이걸 다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