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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무 없는 대구탕, 계란 없는 냉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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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경제에디터

최지영 경제에디터

하수상한 시절이다. 이틀 전 점심때 찾은 식당의 대구탕에 무가 사라졌다. 항상 기다리는 줄이 긴 맛집이었는데, 탕에 무는 없고 콩나물과 미나리만 보였다. 가격을 올리자니 손님이 줄 테고, 궁여지책으로 급등한 재료를 빼고 음식을 만들 수밖에 없는 그 마음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아니 도대체 무 없는 대구탕이라니…

며칠 전 사 먹은 평양냉면엔 계란이 없었다. 1만3000원짜리 냉면에서 사라진 계란 반쪽을 찾아 휘젓다가 “사장님, 계란이 없는데요”라고 물었다. “계란 대신 고기 들어갔잖아요”란 퉁명스런 대답만 돌아왔다.

관세 깎아 수입식품 값 낮추기론
서민 고통 밥상 물가 잡기 요원
이상 고온, 가뭄에 비료값도 폭등
채소등 국내산 농산물 대책 내놔야

최근 급등한 채소 값에 소비자는 장 보러 갈 때마다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지난달 말 정부가 내놓은 물가 대책에 국내산 농산물은 빠져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채소코너. [뉴스1]

최근 급등한 채소 값에 소비자는 장 보러 갈 때마다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지난달 말 정부가 내놓은 물가 대책에 국내산 농산물은 빠져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채소코너. [뉴스1]

가장 최근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8%(4월)다. 2008년 10월 이후 가장 높다는 이 숫자조차 자영업자나 가정이 체감하는 물가 급등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5월엔 5%를 너끈히 넘길 것으로 정부와 한국은행은 내다본다.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장사해서 이문 남기기 힘들다고 하소연이고, 각 가정은 장 보러 갈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정부도 물가를 잡아야 민심이 잡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후 지난달 말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이 ‘민생 안정 대책’인 것만 봐도 그렇다. 기재부는 0.1% 포인트라도 물가 상승률을 내리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관측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정도는 정부가 뿌리는 소상공인 지원금으로 상쇄돼 버릴 가능성이 크다.

이 중 밥상물가 안정 대책은 식용유·돼지고기·밀가루 등 많이 쓰이는 수입 식재료 관세를 0%로 깎아 물가 급등 부담을 줄여보겠다는 건데, 과연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엔 물음표가 붙는다. 가장 관세 인하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진 돼지고기는 이미 대부분 돼지고기 수입이 관세가 0%인 자유무역협정(FTA) 국가에서 들어오는 점을 고려하면 당장 큰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다. 병·캔 등 개별 포장된 가공식품(김치·된장·고추장·간장 등 12개 품목)에 대한 부가가치세(10%)를 면제해주겠다는 것도 인하 폭이 작아 소비자가 얼마나 체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실 처음부터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진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처럼 기업체들 팔을 비틀어 가격을 올리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철 지난 방식이다. 문재인 정부가 도입했던  외식가격 공표제도 효과에 의문이 제기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추 부총리도 민생 대책 발표 하루 뒤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릴 방법이 없고, 그렇게 하면 경제에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실토했다. 세금을 깎아 가격을 낮춘다는 ‘소박한’ 대책 외에는 아직 나온 게 없는 상태지만, 정부는 “추가적인 물가 완화 대책을 계속 강구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정부에 이번엔 무엇보다 국내산 농산물 가격 급등에 따른 대책을 챙겨보라고 주문하고 싶다. 일단 채소류만 봐도 국내 자급률이 80~90%를 넘지만, 5월부터 이상 고온 현상과 가뭄이 찾아오자 가격이 폭등세다. 여기에 올여름 유례없는 고온이 예상돼 채소를 비롯한 국내산 농산물의 작황 부진은 여름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 자명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비룟값 급등에, 외국인 노동자 구하기가 힘들어 인건비가 올라가는 등 악화 요인이 겹겹이다.

과거 국내산 농산물 가격이 흉작 등으로 단기간에 급등하면 정부는 수입산을 늘려 대체재로 가격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공급망 불안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전 세계적 식량난으로 수입산 가격도 급등하면서 지금은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지난해 가을 더위로 저장 물량이 크게 줄어든 감자는 이미 가격이 지난해 두배 수준으로 폭등해 ‘금(金)자’로 불린다. 농수산물 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배추는 10㎏짜리 한 박스가 1년 전 6930원에서 지난달 말 1만520원으로 급등했다. 20㎏짜리 무 한 박스는 지난해 8910원에서 지난달 말 1만4640원으로 64%가 급등했으니, 대구탕에서 사라질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민생 대책 발표 하루 전 배추·무·마늘·양파·건고추 등의 가격 안정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예년의 일상적인 수준에서 못 벗어난 정도다. 비축 물량 쌓았다가 풀고, 수급 불안 때 출하를 조절하는 식이다.

지금의 물가 급등 상황은 평시를 벗어난 특단의 대책을 요구한다. 첫 번째 대책을 수입 물가 잡기에 맞췄다면, 다음은 국내산 농수산물에 맞춰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대책을 속히 만들기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