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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팬덤정치의 포로가 된 민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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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6·1 지방선거로 10년 넘게 더불어민주당의 아성이던 지방권력의 세력 판도가 바뀌었다. 국민의힘이 약진하면서 민주당은 대선 패배에 이어 지방권력의 영토 상당 부분을 잃었다. 지방 조직은 선거의 모세혈관이다. 지난 시기 민주당이 각종 선거를 휩쓸었던 건 시·군·구에 탄탄히 뿌리내린 지방권력의 압도적 우세 덕도 컸다. 다가올 2년 뒤 총선을 생각한다면 민주당으로선 어쩌면 대통령 권력의 상실보다 더 뼈아픈 패배가 될 수도 있다.

새 정부 출범 22일 만이라 불리한 지형이었다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헛발질과 미숙함을 제대로 파고들었다면 충분히 야당의 득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외신기자의 빈축을 산 ‘서오남’(서울·50대·남자) 내각, 대통령 친구와 측근들로 채워진 측근 인사, 검찰공화국을 방불케 하는 검사들의 요직 배치 등 허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무능과 자중지란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했다. 얼마 전만 해도 입법·사법·행정권에 지방권력까지 양손에 쥐고 ‘20년 집권’을 떠벌리던 걸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대선 이어 지방선거에서도 패배
정치 팬덤의 동원엔 성공했지만
폭력적 팬덤과 결별하지 못한 탓
민주성 회복, 민주당에 던져진 과제

“폭력적 팬덤과의 결별”에서 해법을 찾으려던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옳았음을 선거 결과가 보여준다. 박 위원장은 팬덤의 역린을 거스른 이 말을 꺼냈다가 강경파들로부터 ‘당을 떠나라’는 뭇매를 맞고 고개를 숙였다. 팬덤정치의 달콤함에 도취해 정치팬덤을 과신하고 남용한 결과, 도리어 괴물로 변해버린 팬덤정치의 포로가 된 게 지금 민주당의 모습이다.

특정인에게 열광하는 정치 팬덤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대개 셀럽의 팬클럽 수준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이후 광신도로 돌변한 노사모 팬덤을 민주당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당의 체질이 변하기 시작했다. 팬심으로 똘똘 뭉친 열성 지지자들이 당 대표나 대선후보 경선 투표에서 응집된 힘을 과시하면서 ‘안방’을 독차지해버렸고, 중진의원들조차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절대자를 향한 종교적 숭배와 같은 정치 팬덤은 비판과 반론에 재갈을 물리고 진리를 독점했다. 다른 생각을 표시하면 ‘배신자’로 낙인 찍었다. 합리적 비판조차 악마화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파동 때 징계를 받고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은 “민주당은 예전의 유연함과 겸손함, 소통의 문화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김대중이 이끌던 민주당, 노무현이 이끌던 민주당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라고 개탄했다. 지난달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 개정에 반대한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복당 신청을 철회한다며 “개딸(이재명 후보의 열성 지지자)에게 환호하는 민주당의 모습은 수퍼챗에 춤추는 유튜버와 같다”고 일갈했다.

팬덤을 정치적으로 동원해 큰 성공을 거둔 이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오현철 전북대 교수는 ‘문재인 정치팬덤의 복합적 성격’이란 논문에서 “문재인 팬덤은 노무현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 부담감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니라 그들이 죽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며 “그 결과 문화팬덤의 특성인 ‘비판적 거리’를 무시하고 셀럽인 문재인에게 감성적으로 매몰됐다”고 분석했다. ‘문재인=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정신 승리법이 이들 사이에선 진실로 통용되는 이유도 무오류를 신봉하는 반지성적 폐쇄성에 있다. 그러나 오 교수에 따르면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해’ 같은 구호는 권력자 앞에 당당한 주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복종의 다짐으로, 국민주권과 법치주의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리의 퇴행”이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진단이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민주당 팬덤은 ‘시즌2’로 ‘진화’하며 퇴행성을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민의 일반적 정서와 감수성과는 동떨어진 집단행동으로 지지자들조차 돌아앉게 했다. 민주당은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표를 몰아달라고 호소했지만 167석의 국회 의석으로 검수완박법을 통과시켜 여당을 궁지로 몰아붙인 완력 행사가 더 부각되면서 ‘견제론’을 무색하게 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이재명·송영길 후보의 명분없는 출마 강행과 당내 토론 없이 꺼내 든 김포공항 이전 공약에 대한 반론이 일자 이재명 후보의 열성 지지자들인 ‘개딸’(개혁의 딸), ‘양아들’(양심의 아들)은 일제히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 후보는 정치인과 지지자가 서로를 ‘재명아빠’와 ‘딸’ ‘아들’이라 칭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라고 미화하며 팬덤에 편승했다. 경쟁 후보에게 18원 후원금과 문자폭탄을 투하하던 지지자들을 “경쟁을 흥미롭게 해주는 양념”이라고 감싼 것을 연상시킨다. 민주당이 얼마나 깊은 팬덤의 수렁에 빠져있는지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정치팬덤이 위험한 건 특정인을 절대화해 신격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토론과 타협·협상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경쟁자와 상대 진영은 존재해선 안 되는 악마로 취급된다.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문화에서 민주주의는 생존하지 못하고 질식사할 것이다. 민주당에 ‘민주’가 없다? 지방선거가 민주당에 던진 묵직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