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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해방됐을까"…37년차 연극배우 이경성이 본 '추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을 연기한 이경성 배우. 31일 서울 장안동 연극 연습실 부근에서 만났다. 김현동 기자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 엄마 곽혜숙 역을 연기한 이경성 배우. 31일 서울 장안동 연극 연습실 부근에서 만났다. 김현동 기자

“13회에서 갑자기 죽고, 우리 식구들 꽃길만 걷길 바랐죠. 근데 15화 보고 나선 잠을 잘 못 잤어요. 기정이(이엘), 창희(이민기), 미정이(김지원) 다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서…”

'나의 해방일지' 삼남매 엄마 역 이경성 #24일부터 대학로서 연극 '툇마루가…' 공연

드라마는 끝났지만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추앙’ 열풍을 일으킨 JTBC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 엄마 곽혜숙을 연기한 배우 이경성(58)을 31일 서울 장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연습실이 있는 동네였다. 그는 매일 오후 1시부터 그 곳에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29일 마지막 방송을 보고는 그래도 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추구하는 ‘해방’에 대해 “각자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들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미정이는 타인에 대한 원망, 창희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놓으면서 해방이 된다”고 해석했다. 또 “타인을 추앙함으로써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엄마 역을 연기하는 이경성. 37년차 연극배우인 그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다. [사진 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엄마 역을 연기하는 이경성. 37년차 연극배우인 그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다. [사진 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나의 해방일지’에서 그는 등장과 퇴장이 모두 시청자들을 놀라게한 배우였다. 주요 인물인데 모르는 얼굴. 첫 방송 후 “저 배우 누구야?”란 반응이 이어졌고, 가스불에 밥을 안친 뒤 잠깐 누웠다 돌연사하는 장면은 아무도 예측 못한 충격이었다.
“엄마란 물처럼 공기처럼 존재하다 어느날 불쑥 떠나버릴 수 있는 존재인 거죠. 곽혜숙은 과연 해방된 상태로 살았을까…. 아닌 거 같아요. 방송을 보고 친구들이 놀라서 문자를 했길래 ‘나 이제 해방됐다’고 답을 했었죠. 죽기 전엔 해방이 힘들었던 것 같네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엄마가 죽고 난 뒤 삼남매는 해방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육아와 노동의 동지였던 남편도 금세 재혼을 한다.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는 삶의 냉정한 속성이 군더더기 없이 그려진 셈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엄마가 자식들을 붙들고 있었던 걸까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이 작품이 좋은 게 이렇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에요. 시청자들을 공부하게 하는 드라마인 거죠(웃음).”

31일 서울 장안동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경성. 그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했던 대사 "다들 연기하며 사니까 이 정도로 지구가 단정하게 흘러가는 거지"를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꼽았다. 김현동 기자

31일 서울 장안동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경성. 그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김지원)이 했던 대사 "다들 연기하며 사니까 이 정도로 지구가 단정하게 흘러가는 거지"를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꼽았다. 김현동 기자

그에게 ‘나의 해방일지’는 첫 드라마지만, 연기 경력은 올해로 37년째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986년 극단 광장의 ‘어두워질 때까지’로 데뷔했고, 이후 국립극단 등에서 활동하며 ‘전하의 봄’ ‘소풍’ 등에 출연했다. 지난해 4월 연극 ‘구멍’ 공연 때 ‘나의 해방일지’ 캐스팅 디렉터가 찾아오며 드라마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연출을 맡은 김석윤 감독이 그에게 한 당부는 “부담없이 연극 하는 것처럼 해달라”뿐이었다.

그의 등장 신은 큰딸의 남자친구(이기우)를 만나는 장면 딱 하나만 빼고 모두 경기도 연천 시골에서 촬영했다.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는 그로선 불편할 법한 환경이었지만 “제작진의 배려 덕에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촬영 중간 대기할 때 땡볕에 서 있는데 갑자기 누가 우산을 씌워주더라고요. 놀라 돌아보니 감독님이었어요. 그 뒤로 혼자 서 있으면 누구라도 와서 의자도 갖다주며 챙겨주셨죠.”

‘나의 해방일지’의 여운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의 생활은 드라마 출연 이전과 똑같다. 화곡동 집에서 장안동 연습실까지 매일 지하철로 오가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마스크 때문일수도, 기미와 주름을 그려넣은 드라마 속 분장 탓일 수도 있다. 분장을 지운 그의 얼굴은 인터뷰 내내 환하게 반짝였다.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 포스터. [사진 창작공동체 아르케]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 포스터. [사진 창작공동체 아르케]

그는 드라마로 얼굴을 알린 데 대해 “주변 분들의 축하와 응원을 많이 받았다”며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렸다. 그가 국립극단 단원이었던 1991년, 서울예술단에서 뮤지컬 배우를 하던 남편(정봉용)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남편이 고교 음악교사로 직업을 바꿔 가계를 책임지며 그의 연기 활동을 지원해줬다. 그는 “살아있었으면 제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이달 24일부터 7월 10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 준비에 여념이 없다. “드라마 출연이 연극 홍보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연극은 연습 과정부터 너무 좋다. 치열하게 논쟁하며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꿈과 계획을 묻자, ‘연극배우 이경성’으로서의 답이 나왔다.
“1년에 두 편 정도 연극 무대에 설 수 있고, 친구들과 1년에 두 번 정도 여행을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악역을 못해봐서 한 번쯤 악역을 해보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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