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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왕이 한방 먹였다, 중국계 호주 女장관의 '피지섬 도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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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페니 웡(오른쪽) 호주 신임 외교장관과 프랭크 바이니마라마(왼쪽) 피지 총리 겸 외교장관이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페니 웡 페이스북]

지난 27일 페니 웡(오른쪽) 호주 신임 외교장관과 프랭크 바이니마라마(왼쪽) 피지 총리 겸 외교장관이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페니 웡 페이스북]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남태평양 피지에서 ‘제2회 중국·태평양 도서 국가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기 사흘 전인 27일. 취임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호주 신임 외교장관이 피지의 수도 수바의 태평양 도서 국가 포럼 사무국을 찾았다. 중국계인 페니 웡(黃英賢·황영현·53) 외교장관은 이곳에서 “호주는 아무런 조건 없고, 지속 불가능한 재정 부담을 주지 않는 동반자”라고 강조했다. 난데없는 일장연설의 타깃은 따로 있었다. 전날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솔로몬제도를 시작으로 남태평양 8개국 순방에 나선 상황이었다. 호주 외교부 홈페이지에 실린 웡 장관의 연설문은 중국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건설을 앞세운 중국의 ‘부채외교’와 불투명성을 집중적으로 저격했다.

“재정부담 안 줘” 中 부채외교 저격

이 때문이었을까.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맞서 왕이 부장이 직접 참석한 회담에서 공동성명 채택이 불발됐다. 현지 10개국 전체와 안전 보장 협력을 강화하는 협정안 역시 막판에 합의가 보류됐다. 31일 홍콩 명보는 이 과정에서 왕 부장 직전에 피지를 먼저 방문했던 웡 장관의 활약이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출신 중국계 혈통인 웡 장관이 ‘친중’ 성향이었던 과거 노동당 정부보다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서다. 웡은 총선 기간 자유·민주 연합의 스콧 모리슨 전 총리를 겨냥해 솔로몬 제도와 중국의 안보 협정 체결을 막지 못한 것을 호주의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외교 실책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지난 24일 페니 웡(왼쪽) 호주 신임 외교장관이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 국무장관과 도쿄 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페니 웡 페이스북]

지난 24일 페니 웡(왼쪽) 호주 신임 외교장관이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 국무장관과 도쿄 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페니 웡 페이스북]

지난 23일 말레이시아의 중국어 신문 ‘광화일보(光華日報)’에 따르면 웡 장관은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사바주에서 말레이 국적의 중국계 건축가 아버지와 호주 국적의 유럽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모친을 따라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에 정착했다. 애들레이드 대학에서 법학과 예술을 전공한 웡은 2001년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2007년 케빈 러드 노동당 정부에서 기후변화와 수자원 장관에 임명됐다. 2010년에는 재무 및 규제 완화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 총선에 앞서 야당의 그림자 내각 외교장관을 맡았으며 노동당 당내 서열 3위의 거물로 성장했다.

웡 장관은 호주 정계에서 다양한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첫 해외 태생 외교부 장관이며, 첫 번째 아시아계 상원의원이다. 첫 아시아계 재정장관을 거쳤고 처음으로 커밍아웃 한 여성 상원의원이자 정부 장관이다. 파트너와 사이에 딸을 키우며 요리가 취미라고 호주 외교부 홈페이지는 소개했다.

지난 21일 치러진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외교장관에 취임한 그는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안보대화(쿼드)’ 정상회담 차 도쿄를 방문했다. 이어 첫 양자 회담 행보로 피지를 찾아 중국의 안보 협정 체결을 전력을 다해 막았다. 그는 중국이 추진하는 ‘중국·태평양 도서 국가 공동발전 비전’ 협의는 역내 국가의 단결을 방해하고 안정과 번영에 위협이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을 대신해 호주가 향후 4년 동안 팬데믹 회복을 위해 5억2500만 호주 달러(4673억원)를 태평양 국가에 지원할 것이며 호주로 취업 비자 발급도 대폭 완화하겠다고 다짐했다.

대만계 이민 2세인 캐서린 타이(왼쪽 두번째)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미국 무역대표부 홈페이지]

대만계 이민 2세인 캐서린 타이(왼쪽 두번째)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미국 무역대표부 홈페이지]

중국 견제 요직에 중국계 활약 늘어

호주의 웡 장관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중국을 견제하는 요직에 중국계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캐서린 타이(戴琦·46)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대만 이민 가정 2세대다. 과거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의 스파이 조직인 군통(軍統)을 이끌었던 장제스(蔣介石)의 오른팔 다이리(戴笠)의 증손녀다. 트럼프 행정부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중국 담당 고문을 맡았던 위마오춘(余茂春·58)도 중국계 미국인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미크로네시아·팔라우 반발도 주효

이번 중국-도서국 협정 불발에는 미크로네시아 연방과 팔라우의 반대도 작용했다. 미국령 괌과 인접한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데이비드 파누엘로 대통령은 최근 인접한 지도자 21명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이번 협정이 체결된다면 중국과 서방 사이의 신냉전을 촉발할 수 있다며 거절을 촉구했다고 로이터가 최근 보도했다.

파누엘로 대통령은 “협정이 체결되면 태평양 전체의 경제·사회가 베이징 궤도에 올라타게 된다”며 “만일 중국이 통신 인프라·영해·자원·안보를 통제한다면 주권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중국과 호주·일본·미국·뉴질랜드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또 “중국의 해관 시스템을 받아들인다면, 섬 나라 거주자와 입출국자의 바이오 데이터를 수집해 대규모 감시통제가 이뤄질 수 있다”라고도 경고했다. 인구 11만 명의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미국과 외교와 국방을 위탁하는 ‘자유 연합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 Amendments Act)’을 맺고 있어 미국과 관계가 밀접하다.

또 마셜제도·나우루·투발루와 함께 대만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팔라우의 수랑겔휩스 대통령도 최근 주변국 지도자에게 베이징과의 협정은 역내 평화와 안보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주의”를 요청했다고 홍콩 명보가 31일 보도했다.

30일 왕이(왼쪽)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프랭크 바이니마라마(오른쪽) 피지 총리 겸 외교장관과 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지 외교부 페이스북]

30일 왕이(왼쪽)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프랭크 바이니마라마(오른쪽) 피지 총리 겸 외교장관과 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지 외교부 페이스북]

“전당대회 앞둔 중국, 미국 관리 나서”

중국이 이번 협정을 보류한 데는 올 하반기 전당대회를 앞두고 미국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 미·중 관계가 추가로 악화하는 것을 피하려는 요인도 작동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1일 외교상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이 제안한 협정을 스스로 보류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최근 긴장이 고조된 미·중 관계와 당내 권력투쟁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당 내부에 미국과 대결을 불사하는 강경파와 화해를 추구하는 온건파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타진하며 대외 환경을 관리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시진핑 특별대표로 참석한 왕치산 국가 부주석이 서울에서 미국 측에 미·중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나카자와 카츠지(中澤克二) 니혼게이자이 편집위원이 지난 25일 온라인판에서 보도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 인민일보는 31일자 3면에 전날 열린 ‘중국-태평양 도서국 제2차 외교장관 회담’ 개최 사실을 짧게 보도했다. 중국 단독으로 ‘중국과 태평양 도서국의 상호존중과 공동발전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했다고 보도해 회담에서 공동성명 채택이 무산됐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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