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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독자는 까다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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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독자는 까다롭다. 책을 구입할 때는 관대한 독자인 나만 해도 막상 읽으려 하면 사둔 책의 30%만 마음에 들고, 나머지는 구입 당시의 호기심이 사그라들어 시간을 들이기가 꺼려진다.

특히 한 책을 완독하고 다음 책으로 건너가는 데는 에너지가 꽤 든다. 이전 책이 흔들어놓은 인식의 지층, 휘저은 감정, 문장의 결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이 그랬다. 작가는 규모 있게 제1, 2차 세계대전을 동시에 다루면서 일상이 전쟁터가 되는 인생들을 보여준다. 특히 한 여성은 러시아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강간당하는 몸이 되고, 자폐 성향이 있던 한 남성은 전쟁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른다. 태고 마을의 시간은 이들을 온전한 존재로 빚었다가 다시 부러뜨리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왜 수많은 책이 만족스럽지 않나
에세이는 가볍고 사적인 글인가
시대에 맞서는 고민을 엮어내야

이 작품을 읽으면 책장 속 다른 책들은 가벼워 보여 일주일쯤 아무 책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이때 책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돼 숙독의 세계는 당분간 도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다른 수많은 책은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첫째, 구조를 갖춘 책이 드물다. 구조를 쌓는 것은 글쓰기의 핵심인데, 많은 저자는 글을 모아 분류하는 데서 그친다. 그 이유는 구조 만들기란 단순한 재배치가 아니며, 글뭉치가 있어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고도의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작가 존 맥피가 글쓰기에서 1순위로 구조를 꼽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김겨울 작가 등이 얇은 책에서나마 구조를 쌓으려 고민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둘째, ‘말’ 같은 책이 많다. 글은 말과는 다른데, 일상어를 듣는 것처럼 술술 넘어가는 책이 꽤 있다. 문턱이 있어야 사유도 점프해 책을 읽고 난 후의 독자를 변화시킬 텐데, 독자의 질적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 글이 많다. 반면 어떤 ‘말’은 작정하고 쓴 글보다 더 깊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강연집 『글쓰기에 대하여』가 그렇다. 신화, 설화를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짜내는 그녀의 말들은 경어체임에도 불구하고 늘어지는 면 없이 압축미와 완전한 문장을 구사한다.

셋째, 에세이가 대세인 요즈음 에세이를 형식 없는 글쓰기라 여기는 이가 무척 많다. 맞다, 사전에 에세이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는 글이라 돼 있다. 학술논문과 대척점에 있어 예전엔 학계에서 에세이 쓰는 학자를 비판했다. 하지만 에세이엔 다른 뜻도 있으니 논리적, 객관적, 비평적 글쓰기를 일컫는다. 대표적인 예로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있는데, 나는 지금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다시 읽고 있다. 요즘 어떤 이의 글이 논문이냐 에세이냐를 두고 불거진 논란 때문에 에세이의 의미를 곱씹고자 이 책을 읽지만, 한편 편집자로서 일반인들의 에세이에 대한 인식이 너무 관대하다는 불만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했다. 즉 에세이스트는 자기 시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맞서 화해할 줄 모르는 이들이다. 그의 에세이도 역사적 차원의 사고에서 샘솟는 인식력을 강조하며 저항의 미학을 보여준다.

반면 출판계에서 에세이는 말랑한 개인적 이야기, 감상적이고 쉬운 글쓰기와 등치된다. 거기선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것에 관심을 두려는 노력이 잘 읽히지 않는다. 에세이의 선조 격인 몽테뉴의 『수상록』까지 갈 필요도 없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만 봐도 에세이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줄 것이다.

넷째, 글쓴이의 의도가 뻔히 예측되는 글이 많다. 그런 탓에 작가로서의 색채가 옅고 서로 엇비슷하다. 선배 학자들을 추종하면서 동시에 계속 배반하는 글쓰기의 뛰어난 사례는 최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잘 보여줬다. 저자 룰루 밀러는 독자의 선입견과 예상을, 혹은 자신의 제한된 사고를 깨부수는 데 집념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반면 현실의 많은 책은 부수기보다는 쌓기에 능해 잘 닦인 경로로 독자를 안내하고, 그리하여 독자는 읽기도 전에 그 책을 잘 알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실은 지금 내가 편집하고 있는 논픽션 한 권이 그렇다. 모험과 난관 그리고 거기서 얻는 지질학적 지식이 내 예상 경로에 머물러 있어 향후 영민한 독자들의 반응이 벌써 두렵다.

절대적인 책 구매량이 줄었지만, 사실 독자들은 그나마 사놓은 것의 반도 읽지 않을지 모른다. 많은 책은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와 편집자들은 30% 안에 들기 위해 지금도 책을 쓰고 만든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