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정에 대한 신뢰 무너진 사회…시험선수들이 권력·부 차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새 책 『시험능력주의』를 펴낸 사회학자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사진 창비]

새 책 『시험능력주의』를 펴낸 사회학자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사진 창비]

“우리 사회에서 시험에 이렇게 매달리는 건 시험 외에 공정한 절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본적인 시민사회에서 불신의 구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시험능력주의

시험능력주의

신간 『시험능력주의』(창비)를 펴낸 사회학자 김동춘(63) 성공회대 교수 말이다. 지난달 31일 열린 출간 간담회에서 그는 “추천·추첨 등의 절차에 대해 신뢰가 약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국 사태’ 이후 드러난 서울대 교수 등의 자녀 스펙 쌓기 등을 예로 들며 “대학, 기업 등 선발 주체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책의 부제는 ‘한국형 능력주의는 어떻게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김 교수는 서문에 “지금 한국은 ‘시험 선수’ 엘리트들이 권력과 부를 차지하고, 그 자녀도 좋은 학교 보내서 지위까지 세습하는 나라가 되었다. 능력주의는 이 시대의 신흥종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도덕적 표준까지 되었다”고 썼다. 책을 통해 입시·교육 현장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겪는 고통과 함께 엘리트 계층의 권력 재생산, 취업과 노동, 고교 직업교육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짚는다.

책에 따르면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가장 똑똑한 사람, 즉 재능이 있는 능력자가 우대받는 것이 당연할뿐더러 정치나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담론이자 이데올로기”다. 김 교수는 특히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은 “자격시험이 아니라 성적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 학력이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라고 보는 능력주의”라고 썼다. 간담회에서 그는 “이런 시험은 합격이 아니고 탈락이, 떨어진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게 하는 합리적 탈락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시험능력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며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과 고시 합격생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른 대학 서열화나 가치 획일화 등의 문제도 지적했다. 특히 “성적 최상위권 아이들이 다 로스쿨 가고 의대 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며 이런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심화됐다”고도 했다.

젊은 시절 공립고 교사로 3년간 일했던 그는 “대안은 교육에서가 아니라 교육 밖에서 나와야 한다”며 “입시 문제는 대학 문제이자, 수도권 집중 문제이자, ‘좋은 자리’ 차지하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조선업의 숙련 노동자 부족 등을 예로 들며 “미래 인력 구조의 문제이자, 산업도 거꾸러뜨릴 수 있다”며 “교육 문제와 노동 문제가 같이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등을 지낸 고(故) 박세일 서울대 교수에 대해 “저와 입장은 다르지만 이런 문제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완전한 극복은 어렵다”며 대안의 1단계로 “시험능력주의 대신 실적 능력주의”를, 2단계로 “연대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주장했다. “기업들은 이미 실적 능력주의로 갔다”면서도 “기업의 모델이 사회 전체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에 대한 투자의 평준화, 시험을 통한 ‘입학 인증’ 대신 ‘졸업 인증’ 강화 등을 언급했다.

“우리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뀌리라고 보진 않지만, 능력주의 이면에 있는 청년들의 고통, 아이들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이걸 방치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큰 잘못이고 죄악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