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탈원전 탈피’ 넘어 K바이오를 성장동력으로 키워야

중앙일보

입력 2022.05.30 00:32

지면보기

종합 26면

윤석열 정부의 과기정책 어디로 가야 하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아무 데나 ‘K’를 붙이는 것을 싫어한다. 한국에만 있는 것에는 굳이 ‘K’를 붙일 필요가 없다. 다른 나라의 것과 비교해 한국적인 맥락과 특성을 지닌 것이어야 ‘K’가 어울릴 만하다. 한국의 생명과학기술 기반 산업, 즉 바이오산업의 경우는 어떤가. 바이오 기술 개발과 산업화에서 한국만의 독특한 발전경로가 있는가.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다.

산업화를 뒤늦게 시작한 나라들의 산업화 과정에서는 어떤 패턴이 관측된다. 앞서간 나라들이 지나간 길을 압축적으로 밟아간다.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는 필수다. 농업의 산출량은 기본적으로 토지와 용수, 그리고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므로 땅덩어리 크기에 달렸다.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면 종자·농약·비료·농기계를 수입해야 한다. 제조업을 건너뛰고 서비스업 경제로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돈 되는 지식기반 서비스업은 고학력 근로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막 제조업을 시작한 나라는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다. 농촌에서 남는 노동력, 비를 피할 지붕과 ‘미싱(재봉틀)’만 있으면 되는 봉제 산업이 입문이다.

지난 60여년 산업화 모범국 한국
정보통신 다음의 기회는 바이오

바이오 기술주권 더욱 중요해져
국내 의약품 생산경쟁력도 상승

대학·연구소·기업간 공조가 핵심
현재는 탈원전 탈피 정책만 보여

봉제 수출로 처음 일어난 한국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충북 청주 국립보건연구원 바이오뱅크(국립중앙인체자원 은행)를 방문해 혈액· 세포·DNA 등을 보관하는 액체질소냉동고를 살펴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충북 청주 국립보건연구원 바이오뱅크(국립중앙인체자원 은행)를 방문해 혈액· 세포·DNA 등을 보관하는 액체질소냉동고를 살펴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도 봉제 공단이었다. 봉제 수출로 기곗값이 모이면 원단과 실을 만들고자 방직, 방적 산업으로 나아간다. 합성섬유의 원료인 플라스틱, 난방과 운송기계를 위한 기름, 아스팔트를 위해 석유화학산업이 필요해진다. 산업화 단계가 이쯤 되면 도시화가 진행돼 건설 붐이 일어나고 교통량도 증가한다. 커진 철강 수요에 따라 제철소까지 갖게 되면 조선과 자동차 산업에 도전해볼 만하다.

중산층이 형성되고 가전제품 수요가 늘어 전자산업이 시작된다. 엔지니어가 양성되고, 선진 제품을 모방하며 역공학적 학습을 하고, 개량을 넘어 자체적인 기술혁신을 창출한다. 공정 혁신 역량을 발판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와 같은 고부가가치 부품 산업을 일으킨다. 기술경제학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런 산업화 패턴을 실현한 나라가 한국이다. 순차적 산업·화의 과정은 제조 역량 고도화의 과정이며 자본을 축적하고 인적 자본을 고급화하는 과정이다. 산업들이 등장하는 순서를 거꾸로 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후발국의 추격은 보통 거기까지다. 전자산업 다음에 올 법한 바이오산업은 여간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기초과학에서부터 쌓아 올린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있는데, 수직 등반을 위한 사다리 걸치기가 허락되지 않는다. ‘너만의 피라미드를 만들라’는 것이다. 한국은 정보통신과 운송기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오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생명과학·화학·기초의약학 분야의 기초연구 역량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량은 단기간에 확보되지 않는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들보다 약 100년 늦은 1980년대 중반에 국가연구개발사업을 시작했는데, 기술 수명주기가 짧고 기술세대 건너뛰기가 비교적 용이한 정보통신분야의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후 국가연구개발사업은 ‘G7 프로젝트’ 등으로 이어져 전략적 연구 분야를 확대해 갔고, ‘목적기초연구’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기술을 염두에 둔 기초연구 지원사업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 기초 연구 기지개

대학의 기초연구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BK21 사업이 펼쳐진 2000년대 초로 보는데, 산업화 60년 역사와 비교해 최근의 일이다. 바이오 경쟁력을 확보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다. 코로나 백신은 미국·영국·독일·러시아가 개발에 성공했다. 지난해 초, 각국의 백신 이기주의 속에서 한국은 백신을 구하느라 발을 동동 굴렀다. 신종 감염병 위협이 국가 안보 문제로까지 여겨지는 시대에 바이오 기술주권이 확보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은 지난해까지 7개에 불과하다. 신약은 바이오의약 산업의 꽃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신약은 기술 수명주기 관점에서 초장주기 기술에 해당하지만 모든 바이오 기술이 장주기형인 것은 아니다. 진단키트의 핵심인 바이오센서, 의료기기 및 장비 등 분야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빠른 추격이 가능하다.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봄에 다른 나라보다 신속하고 안정적인 진단 체계를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전까지 ‘덜 주목받던’ 주변부의 바이오산업 덕분이었다. 괄목할 만한 것은 바이오의약품 제조산업이다. 최근 신작 『최초의 질문』에서 한국이 고유한 기술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물은 서울대 이정동 교수는, 한국 산업이 가진 높은 수준의 제조 역량이 바이오시밀러와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가능케 했다고 분석한다. 반도체 산업을 통해 기른 공정 관리와 공정 혁신 역량이 까다로운 바이오의약품 제조기술에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바이오의약품 제조의 강자로 부상한 삼성(바이오로직스)과 SK(바이오사이언스)의 그룹 내 주력 계열사가 반도체회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기업이 신수종사업으로 바이오를 점찍어 과감한 대규모 투자에 나선 데에는 제조 역량에 대한 자신감뿐 아니라 바이오를 반도체를 이을 미래 주력산업으로 점찍어 전략적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정부와의 교감이 있었다. 대기업의 바이오산업 진출뿐 아니라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발 바이오 창업도 활발하다. 화이자 백신을 만든 독일 바이오앤텍,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만든 백시텍, 미국 모더나는 모두 대학 발(發) 스타트업이다. 한국의 1세대 바이오 스타트업인 마크로젠은 대학 발, 2세대인 콜마비앤에이치는 연구소 발이다.

바이오 신약 상용화는 미완의 과제

바이오 특허는 유사한 대체기술이 드물어 시장 가치가 높다. 신흥 산업과 신기술에 열광하는 혁신 친화적인 자본 시장은 바이오 스타트업의 성장에 유리한 여건이다. 기존의 화학기반 제약회사들도 속속 바이오제약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시스템과 함께, 과학 기반 스타트업부터 중소·중견기업과 대기업에 이르는 나름대로 완성도 있는 바이오산업부문을 형성하고 있다.

바이오 신약을 글로벌 상용화하는 것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하지만 도전은 계속된다. 올해에만 3~4개의 국산 신약이 FDA의 관문을 넘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수많은 신약후보 물질이 개발되지만 약효와 안전성을 검증하는 과정은 산 넘어 산이다. 불확실성이 크고 실패 확률이 높은 데다 뚝심 있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소위 ‘빅 파마(Big pharma)’라 불리는 글로벌 대형 제약회사들이 시장을 지배한다.

한국은 매출 규모 세계 50위 이내 제약사가 하나도 없다. 국내 기업이 매출 수십조원, 연구비 수조원 이상에 선단식 전주기 신약개발능력과 글로벌 배급력을 갖춘 빅 파마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좋으나 싫으나 해외 빅 파마와의 제휴가 필수다. 민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정부는 2007년 국가임상시험사업단(현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이 출범해 임상시험 인프라를 구축하고 역량을 끌어올려 왔다. 2011년 범부처신약개발사업(현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이 발족해 연구비를 지원할 뿐 아니라 신약 개발의 리스크를 산업계와 나누고 있다. 바이오에서도 한국의 특기인 정부 주도 추격 전략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은 1983년 유전공학육성법을 제정했고, 1994년부터는 생명공학육성기본계획을 수립해 바이오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집중 육성해 왔다. 몇 년 전부터는 분야별 정부 연구비 지출 규모에서 BT(바이오테크) 분야가 IT(정보통신기술)를 넘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IT와 달리 BT는 대학의 연구수행 규모가 민간 부문의 2.7배에 이른다. 바이오 기초연구 기반이 구축되고 있다.

바이오 인력양성 허브가 된 한국

지난 2월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을 ‘글로벌 바이오 인력양성 허브’로 지정했다.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연수 사업이다. 팬데믹은 국가 간 백신 불평등 문제를 드러냈다. 개도국이 자체 백신이나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지만, 바이오의약품 현지생산이라도 해낸다면 불평등 완화뿐 아니라 국제적 보건의료 위기에 공동 대응하는 데에도 효과적일 것이다. WHO는 개도국 출신으로 바이오산업을 일구어낸 한국을 바이오의약품 생산 역량 전수의 적임으로 보았다. 오랜 기초과학 연구역량과 제약 산업 지배력을 가진 선진국과 구별되는, 발전 경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한국적인 특징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K바이오’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인간의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고령사회가 도래하는 것은 국가 발전 수준에 따라 시차가 있을 뿐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본능적 욕망이라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도 바이오헬스 산업 수요 폭발을 막을 수 없다. 정보통신기술의 파도에 제대로 올라타 부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의 다음 기회는 바이오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국은 후발 산업국 중 최초로 선진국의 전유물인 바이오산업을 육성해냈다. 새 정부 초기 과학기술정책 기조는 ‘탈-탈원전’밖에 보이지 않는다. K바이오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꽃피운다면 미래 먹거리 분야에서 윤석열 정부의 최대 치적이 될 것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