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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5월 수상작] 노랑무늬영원, 빗자루별…예사롭지 않은 시어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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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장원>

모란이 왔다  
권규미

그이는 곡비였다 늘 환생을 소원했다
시나브로 발이 젖는 해사한 그믐으로
잔잔히 면벽을 두른 노랑무늬영원, 처럼

찢어버릴 시간과 꿰매야 할 시간들을
아득한 전생부터 알고 있는 바람처럼
한 촉의 심장을 지핀 델포이 무녀였다

척애를 새기듯이 획을 치는 빗자루별
허공이 제 몸 그어 밝혀 든 生이듯이
다복솔 어둠이 외려 생생한 부표였다

◆권규미

권규미

권규미

2013년 월간 유심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ㆍ경주문인협회 회원

<차상>

탱자향 첫사랑 
김은희

숨었던 수줍음이 볼연지 같던 시절
울타리 사이사이 수놓던 노란 향기
수틀에 흰 박동소리 가시처럼 박혀있네

<차하>

나이테를 깎는 남자
오가을

말라버린 나이테는 둥그러진 사연 하나
뼈만 남은 슬픔이 톱밥으로 날린다
서로가 닮아있어서 꼿꼿이 고집이다

옹이진 자리까지 거칠게 힘을 주며
상처는 덮지 말고 자르라고 큰소리다
손길이 부드러워 진다 화병으로 태어난다

나이 많은 나무들이 그보다 작아질 때
아버지를 닮아있는 단단한 표정처럼
나이를 시작하는 점 중심에 박혀있다

〈이달의 심사평〉

싱그러운 5월과 함께 또 다시 백일장의 시간이 왔다.

이번 달의 장원작은 권규미의 ‘모란이 왔다‘로 선한다. 첫 수 초장부터 강한 흡인력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상징적인 시어들을 활용하여 작품 전체에 서사를 담아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곡비로 전이된 그이의 생을 ‘노랑무늬영원’ ‘델포이 무녀’ ‘빗자루별’ 로 확장시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시적 화자가 처한 자기 생의 의미를 이끌어냈다.

차상은 김은희의 ‘탱자향 첫사랑’으로 선했다. 단시조지만 다양한 이미지 활용이 돋보인다. 추상적 감정을 ‘볼연지’라는 구체어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였고 ‘노란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를 수를 놓는다는 촉각이미지로 차용한 점, 수틀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이용하여 흰 탱자꽃을 ‘흰 박동소리’로 변환하여 첫 사랑의 감정을 ‘가시처럼 박혀있’다고 하면서 아련한 아픔을 노래한 점이 돋보인다.

차하로는 오가을의 ‘나이테를 깎는 남자’다. 세 편이 고르게 작품의 완성도를 보여주었지만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시조가 전통적 문학을 표방하지만 얼마든지 새로운 소재, 새로운 시어, 새로운 표현 등을 요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충분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선했음을 밝힌다. 배순금, 최찬희, 이남숙 세 분의 작품도 오래 숙고하였다.

손영희(대표집필), 서숙희 시조시인

〈초대시조〉

노을 한 줌 
최도선

벤치에 노인 홀로 석양빛에 졸고 있다
풀잎을 쓰다듬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말품 좀 팔아드리며 심심함을 달래볼까

헛기침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으시네
저무는 해그림자 쓸쓸히 기우는데
누구를 기다리시나 꼼짝없는 그늘진 등

한 줌 남은 빛일망정 잡아놓고 싶으신가
슬며시 애인처럼 어깨에 손 가만 얹자
거먕빛 반가좌상이 스르르 스러지네

◆최도선

최도선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나비는 비에 젖지 않는다』『겨울기억』 『서른아홉 나연 씨』 등. 비평집 『숨김과 관능의 미학』. 시와문화 작품상 수상.

화창한 봄날이지만, 그래도 봄날은 간다. 공원에 드리우는 햇볕의 농도는 애절하고 쓸쓸하다. 화자의 시선은 노을과 공원벤치가 가득 담긴 사각 액자다. 드문드문 놓여있는 공원 벤치에 노을이 진다. 해그림자는 보자기만 하다가 손바닥 크기로 기울고 있다.

화자의 눈은 현실에서 상상으로 옮겨간다. 화자의 눈에 비친 현실의 풍경은 벤치에 앉아 석양빛에 졸고 있는 노인이다. 노인은 헛기침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그늘진 등만 보이고 있다.

저무는 해그림자가 쓸쓸히 기우는 것은 화자의 심중을 반영한다. 어쩌면 화자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풀잎을 쓰다듬거나 노인 곁에 다가가서 말품을 팔아드리고 싶은 것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다. 한 줌 남은 빛을 잠시라도 잡아놓고 싶은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노인의 바람이다. 석양빛에 조는 것, 쓸쓸히 기우는 해그림자, 한 줌 남은 빛 등은 지나간 시간 속에 남는 풍경이다.

지금부터는 상상의 영역이다. 화자의 마음은 생과 사, 점점이 이어지는 삶의 순간 순간들, 어떤 절대자에게 다가가서 기대고 싶은 절망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화자의 눈과 손은 절대자를 향해 간구하고 기도하는 몸짓과 같다.

화자는 슬며시 다가가 애인처럼 노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이윽고 ‘거먕빛 반가좌상이 스르르 스러’진다. 마치 도가 깊은 스님의 한 생이 존재에서 부재로 변하는 순간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이 한 편의 시조는 셋째 수 종장 한 줄의 심미적 울림과 진폭이 전체를 압도한다. 나머지는 ‘노을 한 줌’을 사유하는 풍경의 여백이다. 문득, 구체적 사물의 생명현상이 존재에서 부재로 바뀌면서, 가없는 환(幻)의 미학적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김삼환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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