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김승필이 말하는 ‘택시 운전사’ 내 아버지 민주화운동 도운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2.05.28 10:00

“생전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 많아...소시민이 사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보여줘”
함석헌·장준하 같은 재야 운동권 인사들과 지속적 교류
아버지 일대기 담은 단행본 예고, “진짜 김사복 알리겠다”

4월 29일 월간중앙과 만난 김승필씨는 아버지 김사복씨를 가리키며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말했다.

4월 29일 월간중앙과 만난 김승필씨는 아버지 김사복씨를 가리키며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말했다.

"내마음 안에 있던 영웅이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김승필씨가 2017년 8월 생애 첫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김사복. 2017년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김만섭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이 영화의 흥행은 김사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영화에서 김만섭이 독일기자 피터를 광주로 데려간 것처럼, 김사복은 1980년 5월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로 내려갔고, 그날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르는 사이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역할을 하는 승필씨는 5·18 42주기에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일생을 담은 책과 영화·웹툰 등을 제작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영화 캐릭터가 아닌 ‘진짜 김사복’의 모습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승필씨는 “소시민인 내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이 나라 주인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다. 4월 29일 월간중앙과 만난 승필씨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도 여럿 제시했다.

“아버지는 나의 영웅, 광주 다녀온 후 울분 토해”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김사복(오른쪽)씨는 위르겐 힌츠페터(왼쪽)와 함께 광주에 두 차례 내려가 당시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사진:김승필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김사복(오른쪽)씨는 위르겐 힌츠페터(왼쪽)와 함께 광주에 두 차례 내려가 당시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사진:김승필

올해 발간하려는 책에 어떤 내용을 담을 생각인가?

“아버지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떤 생각과 소신을 갖고 살아오셨는지가 책의 주된 내용이 될 예정이다. 영화에서의 아버지 모습은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 각색된 면이 있다. 그래서 이번 단행본에서는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과도 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셨다. 아버지가 근무했던 조선호텔 주변에서 일했던 소상공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가 순대나 만두 같은 걸 사서 주변에 나눠주는 식의 선행을 자주 베푸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평소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어느 날 ‘나도 사람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오려서 책 속에 끼워놓은 걸 발견했다. 아버지가 인권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다.”

영화에서는 민주화 시위를 비판하던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걸로 묘사됐다.

“실제 아버지는 1970년대 초중반 유신 정권 때부터 힌츠페터를 비롯한 여러 외신기자는 물론 재야 운동권 인사들과 교류해왔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함석헌 선생을 만나고 와서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랑스럽게 말해주셨던 일이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재야 인권 운동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엄혹한 시기였음에도 아버지는 그분들과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훌륭하신 분들’이라고 얘기해줬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이러한 점만 봐도 평소 아버지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버지가 5·18을 겪고 난 후 어떤 얘기를 하셨나?

“‘같은 민족을 그렇게 죽일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말해준 참상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22살이었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군인이 국민을 총으로 사살했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나. 내가 믿지 못하는 걸 아셨는지 아버지는 5·18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스센터에서 힌츠페터가 광주의 참상을 찍은 영상을 외신기자에게 보여주는 자리에 나를 데려가셨다. 그 영상을 보고 나는 5·18의 진실을 알게 됐다.”

5·18 당시 김사복씨의 차를 타고 광주에 진입한 힌츠페터는 당시의 참상을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그가 촬영한 영상은 독일 전역에 방송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중반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국의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비밀리에 상영됐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영상을 보고 난 후 느낌이 어땠나?

“믿기지 않은 사실들이 눈앞에 펼쳐져서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울분을 토하셨던 것에 크게 공감했다.”

힌츠페터 묻힌 곳 옆으로 이장 추진

4월 29일 월간중앙과 만난 김승필씨는 아버지 김사복씨가 즐겨 읽던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나도 사람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공개했다.

4월 29일 월간중앙과 만난 김승필씨는 아버지 김사복씨가 즐겨 읽던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나도 사람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공개했다.

아버지가 1984년 12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걸로 안다.

“5·18 당시의 트라우마로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신다는 말을 군대에서 자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당시에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것 아닌가’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교통사고 현장을 봐도 그 충격이 하루 이상은 가지 않나.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이 총에 맞는 전쟁터 같은 현장을 직접 뛰어다녔으니, 그 충격은 보통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철없는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너무 죄송스러워 온종일 운 적도 있다.”

당시가 워낙 엄혹한 시기였기에 일각에서는 김사복씨가 ‘군부에서 나를 잡으러 올 수 있다’는 불안감에 더 큰 트라우마를 겪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당연히 불안감을 느끼셨을 거다. 일례로 1986년 11월 힌츠페터는 신민당원들의 광화문 시위 현장을 찍다가 사복 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허리를 다치는 것과 같은 보복을 당했다.”

힌츠페터는 우리나라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당시 힌츠페터는 수상 소감에서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나?

“아버지는 소시민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그리고 부산 출신인 아버지가 광주에서 소신을 펼쳤다는 점에서 지역주의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로 인해 5·18의 진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고 본다.”

2016년 1월 유명을 달리한 힌츠페터는 “광주에 안장해달라”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유해의 일부가 추모비와 함께 광주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에 안치됐다. 승필씨는 아버지 김사복씨의 묘를 힌츠페터가 묻혀 있는 곳 옆으로 이장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버지가 5·18 묘역에 안장되기에는 기여한 바가 적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영화의 모습이 실제 아버지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실제 아버지는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외신기자의 운전기사뿐만 아니라 통역, 매니저, 가이더 역할 등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에 두 차례 찾아갔다. 1980년 5월 20일에 광주에 들어가 21일에 나온 이후 다시 23일에 광주에 들어가 26일까지 머물렀다. 혹자는 ‘김사복씨가 당시 광주의 사정을 모르고 들어갔던 것 아니냐’고 하는데, 전쟁터와 같은 광주에 두 차례나 찾아갔다는 건 아버지가 확고한 소신을 갖고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또 아버지와 힌츠페터의 인연은 1975년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답사 때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가 5·18 당시 활동한 부분은 외신기자들이 쓴 [광주 봉기(The Kwangju Uprising)]라는 책에 힌츠페터가 쓴 ‘I Bow My Head’라는 제목의 글에 잘 나와 있다.”

‘I Bow My Head’에 따르면,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2일 도쿄로 향해 광주에서 찍은 필름을 동료 기자에게 전달한 후 그날 한국에 돌아와 다음 날인 5월 23일 다시 광주로 향했다. 이때도 김사복씨와 함께였다고 힌츠페터는 기술하고 있다.

승필씨에게는 5·18이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세상을 보는 정확한 관점을 줬던 사건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5·18의 진실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어 한때 그러한 진실을 잊고 살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에 알려진 후 아버지의 아들로서 진실을 알리는 데 힘써야 한다는 나름의 소명의식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김사복 추모사업회’의 설립 목적 가운데 하나가 5·18의 대중화·세계화다. 이를 위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 반민주 세력에 대한 규탄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아버지 뜻 이어 민주 세력 지원하는 일에 앞장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는 미얀마 군부 독재 타도와 미얀마 국민을 돕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 ‘프리 미얀마 월드런&워크 언택트 기부레이스’ 등과 같은 행사를 열어 미얀마 민주 세력에게 독립자금을 전하고 있으며 이에 홍보대사인 승필씨도 함께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집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길 바라며,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나갈 건지.

“우리나라가 5·18과 같은 슬픈 역사를 겪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이미 대중이 주도하는 사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대중 주도 사회 속에서 앞으로도 아버지로부터 들은 진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신과 신념을 후손에게 잘 전달해 제2, 제3의 김사복이 등장할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다.”

-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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