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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는 양아치라고? 진조 스타일은 우아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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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진조크루’ 스킴·윙 형제

비보이형제 윙(위)과 스킴. 정준희 기자

비보이형제 윙(위)과 스킴. 정준희 기자

왠지 말걸기 무서운 남자애들이 길거리에서 춤싸움을 한다. 흔한 ‘비보이’의 이미지다. 그런데 오늘 새벽 막내린 JTBC 브레이킹 서바이벌 ‘쇼다운’이 그 이미지를 뒤집었다. 땅 짚고 우당탕탕인 줄 알았더니 날개 돋친 듯 사뿐히, 우아하게 바람을 탄다. 브레이킹이 마냥 격하고 신기한 게 아니라 젠틀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한국이 2024 파리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브레이킹의 우승후보로 꼽히는 만큼 ‘쇼다운’에도 테크닉에 강한 ‘선수’가 많았지만, 브레이킹의 예술성을 각인시킨 건 우승팀 진조크루다. 우아한 춤선과 남다른 완성도, 아이디어가 빛나는 퍼포먼스로 ‘어나더 레벨’로 칭송받은 진조크루는 세계 5대 비보이 대회(레드불BC원, 배틀오브더이어, 프리스타일세션, UK비보이챔피언십, R16코리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팀이다.

쇼다운 우승의 1등 공신이자 비보이 세계 랭킹 2위인 윙(김헌우·35)과 진조크루의 수장 스킴(김헌준·37)은 친형제다. 팀의 대외 활동에 바쁜 스킴은 예술감독인 윙에게 쇼다운 출연을 일임했는데, 윙에게 쇼다운은 이상한 나라였다. 전문 비보이 배틀의 평가기준과 다른 관점을 가진 관객과 심사위원이 판정을 하니 8팀 중 탈락 1순위가 될 뻔 했다. 방송 내내 윙이 심각해 보였던 이유다.

세계 5대 비보이 대회 그랜드슬램

“형이 빠진 건 어벤저스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빠진 격이거든요. 처음부터 잘 풀리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막상 탈락 위기에 처하니 당황스러웠죠. 우리 스타일이 있고 대회 성적으로 증명해 왔는데, 그걸 버리면서까지 관객 눈높이에 맞추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어떤 것부터 끄집어내야 서서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았죠.”(윙)“저희가 춤만 추는 건 아니고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서 저까지 방송에 올인할 순 없었어요. 윙의 디렉팅을 완벽하게 소화할 멤버 설계만 제가 했고, 우리 스타일대로 간다는 전략은 모두의 공감대였죠. 파워풀한 테크닉이 대중성이 있지만, 진조 스타일은 디테일과 스토리라인이거든요. 비보이 세계도 다양한데, 우리가 모든 카테고리를 다 가져갈 순 없으니까요.”(스킴)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세계 정상의 팀이 프로그램 초반에 가장 먼저 탈락 위기를 맞았으니 체면도 구겼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보여주기 시작한 진조만의 예술성과 창조력은 결국 빛을 발했다. “파이널에서 맞붙은 갬블러크루는 파워무브에 강해서 우승을 자신할 수 없었어요. 브레이킹에서 예술성이 중요한데, 관객들은 우리가 창조한 오리지널리티를 모르고 무브먼트로만 보니까요. 파이널에선 무브먼트까지 확실하게 챙기자는 마음이었고, 다행히 잘 통했네요.”(윙)

‘쇼다운’에서 화제가 된 장르융합 미션. [사진 JTBC]

‘쇼다운’에서 화제가 된 장르융합 미션. [사진 JTBC]

‘파워무브’란 기계체조를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회전동작을 총칭하는데, 진조크루에겐 같은 기술이라도 각자 다른 개성을 살린 ‘한끗차’가 있었다. 특히 발레리노 뺨치는 윙의 우아한 춤선은 ‘비보이계의 김연아’라 할만하다. 가장 화제가 된 장르융합 미션에서 피아노곡 ‘인생의 회전목마’ 연주에 맞춰 연출한 퍼포먼스는 브레이킹을 클래식 레벨로 끌어올렸다. “같은 테크닉도 얼마나 멋있게, 어떤 모양과 앵글로 하는지를 중시하기도 하지만, 그때 우리가 단연 돋보인 건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에요. 브레이킹에서 이런 음악을 쓴다고? 전문 배틀에서도 그런 의외성에 창조성까지 더해졌을 때 좋은 평가를 받죠. 늘 즉흥적인 상황을 풀어내는 비보이의 본질은 아무도 예상 못해야 하는 데 있거든요.”(스킴) “오케스트라로 웅장하게 스케일 키우라는 제작진의 제안도 있었는데, 제가 피아노 한대로 고집했어요. 피아니스트는 한번도 못 만난 상태에서 작업했고, 객원 댄서들도 딱 한차례 미팅하고 방송에서 만났는데, 다행히 머릿속 그림이 잘 나왔어요. ‘내가 알던 비보이의 이미지를 깨줘서 고맙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터프한 남자들이 기합만 넣다 들어가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뿌듯했죠.”(윙)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배틀만 하는 줄 알았던 비보이가 이런 예술적인 무대 연출을 어디서 배웠나 싶은데, 지난해 우승한 배틀오브더이어 같은 세계 대회에서 배틀 참여 자격을 얻으려면 먼저 퍼포먼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당시 진조크루는 국악을 활용한 퍼포먼스와 배틀에서 차례로 우승해 2관왕을 차지했다. “어디서 교육받은 게 아니라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터득한 거죠. 윙은 태양의 서커스에서 안무감독 제안까지 받았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어요.”(스킴) “태양의 서커스 캠프에 참여한 적이 있거든요. 마지막에 공연을 올릴 때 디렉터에게 한수 배우려고 했는데, 제가 평소에 멤버들과 하는 방식과 비슷하더군요. 디렉터로서 대형 공연을 만들고 싶은 꿈도 있어요. 어려서부터 자기가 직접 디렉팅한 무대에 서는 성룡이나 이소룡처럼 되고 싶었거든요(웃음)”(윙)

형제는 중학생이던 90년대 후반 대유행한 만화 『힙합』을 보면서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끌어주는 선생님도 없던 시절, 만화책과 비디오를 스승 삼아 놀이터 흙바닥에서 친구들과 뒹굴다 잘한다는 형들이 모인 곳을 수소문해 조금씩 넓은 세상으로 진출했다.

지난해 ‘배틀오브더이어’에서 우승한 국악 퍼포먼스. [사진 진조크루]

지난해 ‘배틀오브더이어’에서 우승한 국악 퍼포먼스. [사진 진조크루]

뽀얀 얼굴의 귀한 두 아들이 흙바닥에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부모님 심정이 어땠을까 싶은데, 오히려 “무관심이 약이 됐다”고.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힘드셨어요. 우리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춤을 춘다니 나쁜 길로 안 빠지는게 어디냐며 놔두셨는데, 성인이 되고 이제 그만둬야지 않겠냐 하실 즈음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성과를 보여드리면서 인정받았죠.”(윙)

스킴은 “우리에게 별난 드라마는 없다”고 했지만, 아무나 세계대회를 휩쓸 순 없다. 진조크루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저렴한 심야 연습실을 빌려 매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새벽연습을 쉬지 않았던 ‘세상과의 단절기’가 있었다. 연예계의 숱한 러브콜에도 한번도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저흰 삼국지 도원결의하는 느낌으로 시작했거든요. 다른 분야로 진출이 아니라 비보이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주변에서, 한국에서, 해외에서, 우리가 제일 잘하는 팀이 되고 싶었죠. 아직 비보이로 어디까지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없어서 더 재밌는 것 같아요. 한계가 안보이니 없던 그림을 만들 수 있잖아요.”(윙)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윙(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그런데 이 사람들, 춤만 고급진 게 아니라 태도와 행동도 젠틀하다. 방송에서 클래식 공연 컨셉을 시도하고, 수트 차림으로 힙합 문화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던 것도 평소 가진 철학 때문이다. “비보이는 ‘양아치’라고들 하잖아요. 사람마다 다른데, 비보이로 살다보니 안좋은 시선을 많이 느껴서 더 예의바르고 젠틀하게 행동하려 노력해요. 대표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중요하니까요. 만약 저부터 골초에 파티만 다닌다면 동생들도 따라하겠죠.”(윙) “제가 듣기론 발레도 뒷골목에서 시작된 걸 귀족들이 끌어올린 거라고 하던데, 저희도 하나하나 노력하며 ‘바른 청년’ 애티튜드를 만들었어요. 답답해하는 친구들도 있죠. 자유로운 힙합정신이 아니라는데, 저흰 이게 힙합정신을 더 외치기 위한 길이라고 믿어요. 그냥 춤추는 게 아니라 춤으로 성공하고 싶으니까요.”(스킴)

파리 올림픽 대비 선수 발굴도

윙이 만든 엘보우 프리즈 동작. [사진 진조크루]

윙이 만든 엘보우 프리즈 동작. [사진 진조크루]

실제로 진조크루는 춤만 추지 않는다. 삼성동 사무실에 가니 방송에서 펄펄 뛰던 멤버들이 책상에 얌전히 앉아 업무를 보고 있다. 2015년부터 부천 세계 비보이 대회 운영을 맡아 코로나 기간에도 온라인대회로 대처할 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을 자랑한다. 비보이들이 직접 연출총감독은 물론 마케팅, 디자인, 영상제작, 대외협력 등을 분담하고 있다. 올해는 비보이를 전문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회사까지 차렸다.

“댄서들이 불이익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세계적으로 한국을 알리는 아티스트인데, 이벤트에 초청받아도 가수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죠. 댄서들도 대접받아야 후배들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잖아요. 회사로서 제도적으로 바꿔보려는 거예요. 스타 한두명을 키우기 위한 게 아니라, 비보이가 직업군으로 자리잡도록 다양한 기회를 만들 겁니다. 평생직장이 없으니 미래 걱정하느라 춤에 집중 못하는 댄서들이 많은데,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성공궤도를 닦아놓으려는 거죠.”(스킴)

윈(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윈(왼쪽)과 스킴. 정준희 기자

올림픽 입성도 진조크루가 2016년부터 세계댄스스포츠연맹과 함께 대비해 온 프로젝트다. 하지만 ‘힙합 문화를 스포츠로 만들어 돈을 번다’며 비난하는 시선도 있다. “비보이 문화를 변질시킨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비보이에 스포츠 영역도 생긴 것일 뿐, 우리 고유의 컬처는 이어가야 하거든요. 저희가 선수발굴도 하면서, 선수가 못되는 사람들에게 브레이킹 시범단처럼 다양한 기회를 만들고 있는 것도 그래서죠.”(스킴) “2000년대 뜨거웠던 비보이 인기가 한국에선 다 식었어요. 저희가 아직 살아남은 건 외국에서 불러줬기 때문이죠. 외국인들이 K팝 가수처럼 한국 비보이를 응원해 줬는데, 올림픽 이후에도 다른 나라 비보이를 응원해 줄까 모르겠어요. 이제 한국 비보이를 한국인들이 응원해 주셔야 합니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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