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동북지역 자원 많고 철도망 발달, 일·러 눈독 들여

중앙선데이

입력 2022.05.2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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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0〉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중앙)를 내세워 만주국을 선포했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승인하지 않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사진 김명호]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중앙)를 내세워 만주국을 선포했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승인하지 않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사진 김명호]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기형(畸形)국가로 변했다. 봉건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발전과 군비 확장, 전쟁 준비에 머리를 싸맸다. 조선 침략과 중국 정복이 목적인 대륙정책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실현을 위해 1894년 갑오년(甲午年), 중국(청나라)과 전쟁을 일으켰다. 청 제국의 발상지 동북(만주)에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중국은 연전연패(連戰連敗), 순식간에 안둥(安東), 다롄(大連), 뤼순(旅順)을 점령당했다. 대가는 개떡 같았다. 은 2억냥 외에 대만(臺灣), 펑후(澎湖)열도, 랴오둥(遼東)반도를 일본에 떼줬다.

일, 러와 전쟁 앞서 미에 조정 요청

한때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 운영하던 중동철도의 객차는 호화의 극치였다. 흔히들 달리는 호텔이라 불렀다. 하얼빈에 도착한 중동철도 여객열차. [사진 김명호]

한때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 운영하던 중동철도의 객차는 호화의 극치였다. 흔히들 달리는 호텔이라 불렀다. 하얼빈에 도착한 중동철도 여객열차. [사진 김명호]

동북에 군침을 흘리던 러시아는 일본의 동북 진출에 긴장했다. 독일,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라고, 기한까지 정해서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은 3국의 간섭에 손을 들었다. 다시 청나라를 협박했다. 은 3000냥을 뜯어냈다. 3국 간섭에 공을 세운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강점, 랴오둥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중국과 일본 간의 모순이 격화됐다, 일본과 러시아도 동북의 이권을 놓고 으르렁거렸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미국을 끌어들였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하버드대학 동기인 귀족원 원장을 미국에 파견했다.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조정에 나설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미국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 영토인 동북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자웅을 겨뤘다. 청나라 정부는 자국 경내에서 벌어진 북극곰과 섬나라 원숭이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중립을 선언하고 방관했다. 동북 주민들만 골탕을 먹었다. 승리가 일본 쪽으로 기울자 미국이 조정에 나섰다. 코딱지만 한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열렸다.

‘포츠머스조약’은 러시아와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이익 나눠 먹기였다. “러시아 정부는 뤼순과 다롄 및 부근의 영토와 영해의 조차권(租借權)을 일본에 양도한다. 러시아는 창춘(長春)과 뤼순과의 철로와 지선의 부속 권리, 광산 채굴권 등 모든 특권과 재산권을 무상으로 일본에 양도한다.” 부칙도 있었다. “양국은 각자의 철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수비대를 주둔시킬 권리가 있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감독하에 두기로 한 것은 덤이었다. 이쯤 되면 날 강도들과 별 차이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동북을 탐낸 이유가 있었다. 동북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했다. 면적이 일본의 2.6배, 프랑스와 독일을 합한 것보다 넓었다. 도처에 수력 자원과 삼림이 널려있고, 석유, 석탄, 금속의 매장량은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철도망도 발달했다. 중동철도와 후일의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인 난만다오(南滿道), 베이징과 선양(瀋陽)을 잇는 징펑(京奉)철도의 지선을 제외한 총 길이가 3200㎞를 웃돌았다.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역 주변에 인구가 몰리고 시장이 섰다. 새로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은 인구가 많고, 농지가 부족했다. 중국 동북 지역에 개척단 명의로 대규모 노동이민을 권장했다. 산간에서 노동 중인 일본개척단. [사진 김명호]

일본은 인구가 많고, 농지가 부족했다. 중국 동북 지역에 개척단 명의로 대규모 노동이민을 권장했다. 산간에서 노동 중인 일본개척단. [사진 김명호]

러·일전쟁 승리 후 랴오둥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남만주철도의 보호와 권익 확대를 위해 식민통치기구를 출범시켰다. 랴오둥수비사령부와 군정부(軍政部)를 설립하고 참모총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했다. 뤼순과 다롄의 조차지를 관동주(關東州)로 명명한 후엔 관동도독부를 설치해 관동총감이 관동주(關東州)와 남만주철도 연변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했다. 1919년 일본 정부는 관동도독부 군정부를 관동군사령부로 독립시켰다. 민정 업무는 민정청을 신설하고 문관을 민정장관에 임명했다. 관동도독부는 간판을 내렸다.

관동군은 관동주와 남만주에 주둔하는 육군부대였다. 관동주 방위와 남만주철도 보호가 임무였지만 말로만 그랬다. 일본 군국주의의 동북 침략 최선봉이었다. 사령관도 천황이 직접 임명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도 일본이 동북을 침략하기 위해 다롄에 설립한 기구였다. 훗날 초대 조선총독과 총리대신을 역임한 육군 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설립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창춘에서 다롄, 안둥에서 선양까지의 철도와 동북 최대 규모의 푸쑨(撫順)탄광, 안산(鞍山)철강, 다롄항 외에 창고, 전기, 메탄가스 등 10여 개 대기업을 경영했다. 다롄에 있는 만철조사부는 정보기관이나 다름없었다. 선양, 지린(吉林), 하얼빈(哈爾賓),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중국의 군사, 정치, 경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치제도와 풍속, 생활습관도 면밀히 조사했다. 만주국 연구의 1차 자료인 만철조사월보(滿鐵調査月報)는 물론,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과 성경시보(盛京時報)도 발간했다.

데라우치, 만철 설립 위원장 맡아

만철은 일본이 동북에 세운 국책회사였다. 1100㎞에 달하는 철도 주변의 농토와 연병장, 광산, 시가지를 만철 부속지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침점(侵占)했다. 통계에 의하면 1930년 초, 만철 부속지 면적이 482.96㎢, 직원은 3만4800명이었다. 만철부속지에 일본 군경(軍警)과 특무기관, 극우단체가 파견한 대륙낭인, 정체를 숨긴 침략기관이 약방, 서점, 연구소 등 그럴듯한 간판을 내걸었다.

중·일전쟁 승리 33년 후, 1927년 6월 말, 일본 정부는 도쿄 외상 관저에서 동방회의를 소집했다. 주중공사, 펑텐·우한(武漢)·상하이 총영사, 관동군 사령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 회의 참석자들은 수상의 말에 공감했다. “일본은 만주와 몽골에 책임이 있다. 특히 동북지역은 일본의 생명선이다. 중국 본토와 단절시켜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일본의 보호를 받는 독립국가를 선포할 방법을 강구하기 바란다.”

동방회의 4년 후,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동북군을 공격했다. 만주사변의 막이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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