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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 숨기려는 남성성, 폭력과 연관돼 사회에 해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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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호 26면

이현석의 ‘소설의 곁’

이현석 칼럼

이현석 칼럼

갑작스럽게 높아진 혈압은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 들어갈 때 자주 겪는 문제다. 이는 병원에만 오면 혈압이 높아진다는 ‘백의(白衣)고혈압’의 일종으로, 이 증상을 설명하는 한 가지 가설은 ‘투쟁-도피 반응’이다. 옛날 사람이 길을 걷다 곰을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순간적으로 자율신경계에서 혈액 내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어 맥박·호흡 등이 빨라지면서 혈압이 올라간다. 근육에 혈액량을 증가시켜 강한 힘을 쓰게 만들기 위한 조치로 인간은 이 힘을 통해 곰에게 일격을 가하거나(투쟁),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칠 수 있다(도피). 현대인에게는 곰보다 직업적 생존이 중대한 바, 이 가설은 꽤 타당해 보인다. 특히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은 원청에서 특정 혈압 이하이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기준 혈압 초과 여부에 따라 일당이 달렸기에 긴장을 하지 않을 강심장은 외려 드물 것이다.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경우는 대체로 남자들이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혈압을 높이는 교란요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다. 예컨대 남성의 흡연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검사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담배를 한두 개피 피우고 들어오기가 다반사다. 간밤에 폭음을 해서 혈압이 높아진 것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할 때도 남성들이 훨씬 많이 소비하는 ‘술’이라는 교란인자가 등장한다. 이쯤 되면 혈압이 높아진 이유가 긴장 때문인지, 담배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모를 지경이 된다. 혈압 때문에 측정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도 잦고 실랑이가 벌어지면 분개하여 혈압이 더 오른다. 그중 일부는 결국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검사장 문을 박차고 나간다.

같은 일을 자주 겪다보면 왜 남자들은 유독 불건강한 행위를 많이 하는지, 본인이 긴장해서 혈압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지,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방어기제로 쉽게 ‘분노’를 표출하는지 궁금해지기 마련. 미국공중보건학회지에 실린 논문 ‘진짜 남자는 그러지 않는다: 남성성의 형성과 공중보건학적 개입의 비의도적 위해’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논문은 공익광고에서 동원하는 ‘진짜 남자(Real Man)’라는 슬로건의 영향을 분석해 허구적인 ‘남성성’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면을 실증한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은 남성성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성은 가부장제 하에서 영유아기 남성에게 취약성을 숨기도록 훈육함으로써 형성된다. 이는 남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고 타인과의 친밀성을 차단하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감정적 금욕’을 체화하면서 성인이 된 남성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와도 같은 ‘남성성’ 때문에 고통 받는다. 통증이 있어도 참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며, 본인이 아프다는 사실을 타인과 공유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논문은 남성성이 폭력 및 성폭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까닭에 남성에게만 유해한 것이 아니라 전체 인구의 건강에 부정적이라고도 말한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이쯤에서 임국영의 소설집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자음과 모음, 2021)에 실린 단편 ‘추억은 보글보글’을 보자. 이 소설은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이 필연적으로 안게 되는 취약성을 정교한 서술을 통해 묘파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두 명의 남성인 ‘도진’과 ‘원경’은 오락실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다. 그들이 주로 했던 ‘보글보글’ 게임처럼 소설은 두 명의 플레이어를 뜻하는 ‘1p’ ‘2p’로 챕터가 나뉘어 도진과 원경의 입장에서 각기 번갈아가며 서술된다. 흥미롭게도 ‘1p’의 화자인 도진은 현재시점에서 사망했다. 따라서 소설은 ‘2p’의 화자인 원경이 도진과의 과거를 곱씹는 소설로도 읽히는데, 원경은 호승심이 강한 자신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남자답지 못했던 도진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했다. 그런 도진이 성인이 되어서도 나약한 모습을 계속 보이자 원경은 화를 내며 충고한다. 연애라도 해라. 친구라도 만들어라. 제발 적당히 하고 정신 좀 차려라. 이때 원경이 도진에게 표출하는 유일한 감정이 ‘화’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감정이 바로 분노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남성성은 분노를 긍정적으로 여기며, 동시에 분노를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을 감추기에 용이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원경의 분노를 마주한 도진은 더는 우울을 토로하지 않는다. 이로서 원경이 영영 알 수 없게 된 도진의 이야기는 도진이 화자인 챕터를 통해 드러난다. 폭력적인 아버지, 사업실패, 어머니의 도주라는 사건을 경유하면서 도진은 아버지에게마저 버림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 헌신적으로 가사를 도맡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도진에게 오락실에서 만난 원경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원경과 맞서 승부를 내기보다는 나란히 몸을 붙이고 앉아 같은 화면을 바라보는 일을 사랑했고, 그 일에 온전히 제 모든 것을 내던졌다.

원경은 도진의 이런 속내를 모른 채 그를 잃게 된다. 남자다움을 당연시하고 살았던 원경에게 도진은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게임에서 승리했을 때조차 도진은 패자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원경은 그런 도진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진은 남성성의 각본에 맞지 않는 남성이었던 셈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레반트는 사회적으로 강제된 남성적 성역할의 요소로 ‘감정 억제’ ‘성취 및 지위 추구’ ‘공격성’ ‘동성애 혐오’ ‘성생활에서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태도’ 등을 열거한다. 이 요소는 남성들이 남성성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어떤 남자가 될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줄 알고, 타인과 연결되고, 사회에 책임감을 가지며, 사회와 개인이 근원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아는 남성. 도진은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을지 모르나 가부장제에 종속된 세상은 그렇지 못했기에 그는 세상과 불화했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 원경은 죽은 도진과 미묘한 방식으로 다시 연결된다. 원경은 아주 오랜만에 ‘보글보글’ 게임을 하게 된다. 그 게임을 하면서 남은 나날 동안 지난 일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저주에 걸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도대체 이런 저주는 누가 건 걸까. 흑막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자신의 남성성이 결국 취약한 지반 위에 서 있었음을 원경이 시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원경은 과연 추억의 게임 속에서 도진이 남긴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원경이, 그리고 세상의 많은 남자들이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이현석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데뷔했다.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소설집으로 『다른 세계에서도』가 있다. 본업은 의사로 현재 공업도시의 한 종합병원에서 산업재해 및 업무관련성 질환을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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