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류인, 궁극의 계란 프라이 얻으려 10개 연달아 부쳐

중앙선데이

입력 2022.05.28 00:21

업데이트 2022.05.2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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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호 22면

황인 예술가의 한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을 보여준 류인(1956~1999)은 10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조각계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사진 류인 유족]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을 보여준 류인(1956~1999)은 10년 남짓한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조각계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사진 류인 유족]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의 연세대 동문길은 걷기만 해도 교양과 품위가 몸에 밸 것 같은 길이다. 이 길에는 어린이 책방으로 출발한 ‘초방’, 예술영화 중심의 소극장 ‘필름 포럼’ 등이 있다. 파리마치, 슈피겔 등 유럽의 주간지들을 비치한 북 카페 ‘프린스턴 스퀘어’도 한때 이 길의 주인공이었다. 김옥길 기념관에서 법현학사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은 고양이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기념관의 바로 옆집이 조각가 류인(1956~1999)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다. 담장이 없어 집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류인의 힘찬 인체 조각이 오랫동안 마당에 서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본격적 작품활동 10여년, 43세에 요절

류인은 화가인 류경채(1920~1995)와 극작가 강성희(1921~2009) 사이에서 태어났다. 류경채는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예술원 회장을 지냈다. 그의 형 류훈 또한 조각가였다. 누가 봐도 류인은 예술계 엘리트 집안 출신이었다. 큰 예술가를 부모로 둔 예술가 자식이 제대로 기를 펴기란 쉽지가 않다. 류인은 이 조건을 돌파하고 극복했다.

류인과 류경채의 부자유친은 독특했다. 류인은 세상 모두와 불화였다. 그의 부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항적이기까지 했다. 예술가는 신과 단독으로 만나는 존재이므로 가족을 통해 형성된 예술공동체란 애초부터 부질없는 것이었다. 부친의 그림에도 은근히 불만이었다. 1990년 가을 현대화랑에서 류경채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를 기념하여 류경채의 대형화집이 만들어졌다. 전시하고 화집을 만들기 위해서 대신동 류경채의 자택에 있는 작품들을 다 꺼내 촬영했다. 꺼내어져 나오는 작품마다 류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작품들 속에서 심하게 상한 베니어합판 하나가 나왔다. 베니어합판은 이미 세로로 몇 줄 뜯긴 상태였다.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물감이 묻은 흔적이 있어 원래는 회화작품이었을 거라고 겨우 짐작될 정도였다. 이 집의 문짝을 떼어다가 화폭으로 삼아 그렸는데 그림은 사라지고 세월만 남은 작품이었다. 류인은 그걸 들더니 드디어 아버지의 작품 중에서 제대로 된 최고의 작품을 발견했다고 기뻐했다. 그 모습을 바라다보는 류경채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왼쪽부터) 민성래, 조상필, 류경원, 오상일, 오상욱, 류인, 소조각회 창립전, 예총회관, 1987년. [사진 류인 유족]

(왼쪽부터) 민성래, 조상필, 류경원, 오상일, 오상욱, 류인, 소조각회 창립전, 예총회관, 1987년. [사진 류인 유족]

세월이 흘렀다. 류경채, 류인 부자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2022년 1월 ‘에이도스(Eidos)를 찾아서: 한국 추상화가 7인’전이 학고재에서 열렸다. 류경채의 유작도 출품되었다. 이때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끈 매력적인 작품은 바로 이 베니어합판이었다. 1964년 작 ‘계절’이다. 결국 류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불화는 애정의 다른 표현이었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애정이었다.

류인은 체구가 작고 가늘었다. 전시가 끝나고 작가들끼리의 뒤풀이에는 류인이 가장 분주했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이 자리 저 자리로 돌아다니며 아무에게나 말도 걸고 술도 권했다. 류인은 술과 사람을 좋아했다. 대화는 악의가 없는 시비로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시비가 안 먹히면 자기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 자신의 이름은 어질 인(仁)이다. 어질 인(仁)자를 외자로 쓰면 건강이 좋지 않고 단명한다는데 그래서 몸이 아픈 거라고 작명을 한 부친을 원망했다. 건강과 작명과 부친에 대한 원망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그의 상상력은 엉뚱했지만 결국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류인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동년배인 조소과의 신동효, 오상욱, 조소과 선배인 김진성, 오상일 등과 친했다. 이지적이고 문학적 소양이 깊은 오상일과는 서로 결이 다른 데도 친했다. 독서를 통한 지식보다는 직관과 통찰에 의존한다는 점에선 김진성과 통했다. 학교의 기물을 예사로 뜯어다 조각재료로 쓰는가 하면 학교 앞 ‘계단집’에 엄청난 외상을 달아놓고도 태연자약했다. 위악을 즐기는 악동이었으나 밉지는 않았다.

류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다녔다. 부친 류경채의 고향은 여수다. 여수 돌산 평사리에는 문화 류씨 집성촌이 있다. 류인은 여수에 애정을 가졌다. 장차 아내가 될 서양화가 이인혜와 함께 숙부들이 사는 여수 돌산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구 대신동에 터를 잡은 류씨 일가는 생선을 좋아했다. 신촌시장에 물 좋은 생선이 들어오면 호쾌하게 궤짝으로 사다 먹었다. 서대를 특히 좋아하여 여수에서 배달하여 먹었다. 여수의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말린 반건조 서대를 조려서 먹었다. 류인은 통풍이 있어 등 푸른 생선을 못 먹었다. 고춧가루 없이 말갛게 끓인 생선 지리도 좋아했다.

윤의 변 II, 브론즈, 철, 107x122x68㎝, 1988년. [사진 류인 유족]

윤의 변 II, 브론즈, 철, 107x122x68㎝, 1988년. [사진 류인 유족]

류인은 주로 대신동에서 작업했다. 본가의 뒤뜰, 이화여대 후문, 지금은  류씨예술연구지려가 된 건물 등이 그의 일터였다. 서울교대에서 조교생활을 할 때 작업실을 하나 배정받았다. 거기서도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류인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기간은 10여년에 불과하다. 석조나 철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고 제작공정에 손이 많이 가는 게 브론즈 조각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가 남긴 작품 수, 특히 순수한 개인 창작의 작품 수는 예외적으로 많은 편이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건축비의 1%를 환경조형물로 조성해야 한다는 법이 권장되고 시행되었다. 조각가들이 환경조형물 시장에 뛰어들었다. 노동보다는 기획이 더 요구되는 조각, 손 대신 머리를 쓰고 설계에 기대는 조각이 등장했다. 1990년대가 되자 화랑에서도 개인 창작의 조각 전시회가 줄어들었다. 화랑은 운반과 보관이 번거로운 조각 대신 회화를 더 선호했다. 구상조각은 조각계 내부에서도 입지가 좁아졌다. 1987년 류인, 오상일, 오상욱, 민성래, 조상필, 류경원 등 구상조각가들이 모여 소조각회를 만들었다. 소는 소조(塑造) 즉, 모델링을 뜻한다.

브론즈 조각은 손으로 흙을 주무르는 소의 작업에서 시작한다. 손의 노동이 절대적이다. 조각가의 손이 노동에 게을러져 가던 시류를 역행하여 왜소한 체격의 류인의 손은 그 누구보다도 노동의 근육을 힘차게 움직였다. 흙을 만지고 주무르며 대형조각까지도 제작했다. “작품만큼 정신적 노동의 대가가 확실한 것은 없다.” “오늘도 스스로 흙에 젖어 들면서 나의 두께를 확인해본다. 무엇보다 흙은 숨결의 전달이 가능했고, 그 감정은 정직하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복잡한 심리표현에 최적의 수단이었다. 그 이유로 나는 흙 앞에 진지해야만 했다.”(류인의 작가노트) 흙의 노동자 류인은 손의 근육으로 사유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쉴 새 없이 작업, 류마티스 관절염 걸려

강도 높은 노동력, 높은 제작비 등을 고려하면 지속적인 제작이 부담스러운 브론즈 조각이지만 류인은 개인 창작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무리하게 브론즈 조각의 전 공정을 한꺼번에 다 하지 않았다. 우선 흙으로 몰딩을 한 후 이를 합성수지(FRP)로 떠서는 보관했다. 합성수지는 브론즈 에디션을 위한 원본이 되어 주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주물공정은 일단 뒤로 미루었다. 류인에게 가끔 환경조형물 일감이 주어졌다. 여기서 생긴 돈으로 전에 떠놓았던 개인 작업의 합성수지 원본을 주물공장에 보내어 브론즈 주물공정을 마쳤다. 이 제작방식으로 류인은 쉴 새 없이 균질한 속도로 개인 작업의 브론즈 조각을 지속해서 제작해낼 수가 있었다.

류인에게는 류마티스 관절염이 있었다. 그의 인물상에서 보이는 불퉁불퉁 불거져 나온 손가락 발가락은 류인의 몸인 듯 아프다. 시대도 몸도 그를 억압했다. 그 억압의 몸도 서서히 소멸하여 갔다. 까탈스러워졌다. 너무나 일찍 찾아온 말년의 몸은 단백질을 원했다. 부인 이인혜에게 계란 프라이를 부탁했다. 불의 세기, 기름의 양, 시간을 다 따졌다. 마지막에 프라이팬 뚜껑을 덮어 계란의 윗면을 살짝 익혔다. 바삭하고 촉촉한 궁극의 계란 프라이 하나를 얻기 위해 10개를 연달아 부쳤다.

무모하게 소모하고 소진하는 일. 그리하여 궁극에 이르는 일. 그게 류인의 작업이고 삶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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