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웬 흑인 귀족? 지나친 PC 역풍에 콘텐트 공룡 휘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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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호 02면

‘정치적 올바름’ 추구 콘텐트 논란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에 흑인 귀족이 있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각 사]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은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에 흑인 귀족이 있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 각 사]

가정주부 조현아(45)씨는 온라인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넷플릭스 구독을 최근 해지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다. 조씨는 “언제부턴가 동성(同性)끼리 키스하는 등 교제하는 장면이 들어간 드라마가 너무 자주 노출돼 당혹스러웠다”며 “동성애가 나쁜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 자녀가 동성애를 일반적인 일로 묘사한 드라마를 접하고서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진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로서 솔직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성인용 콘텐트 시청을 제한하는 미성년자 보호 기능을 제공한다. 하지만 자녀가 수시로 드나드는 거실의 TV를 통해 부모가 성인용 콘텐트를 시청하는 집에선 효과가 미미한 기능이라는 게 조씨의 설명이다.

넷플릭스의 올 1분기 글로벌 유료 가입자 수는 2억2160만 명으로 지난해 4분기보다 20만 명 감소했다. 넷플릭스의 분기 기준 유료 구독자 수 감소는 2011년 이후 11년 만의 일이다. 2분기엔 200만 명이 더 줄어들 것으로 회사 측은 예상했다. 국내에서도 월간 이용자 수(MAU)가 지난달 1153만 명으로 1월(1241만 명) 대비 88만 명 감소했다(모바일인덱스 집계). 국내에선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에 따른 야외활동 증가, 해외에선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러시아 시장 서비스 중단이 각각 주된 원인으로 꼽히지만 일부 외신 등에선 한 가지 해석을 더 내놓고 있다. 바로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역풍’이다. 과도한 PC 추구 콘텐트의 급증에 반감을 가진 소비자들이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흑인 캐스팅 ‘블랙 워싱’ 부작용

DC코믹스의 ‘수퍼맨’은 최근 양성애자로 그려졌다. [사진 각 사]

DC코믹스의 ‘수퍼맨’은 최근 양성애자로 그려졌다. [사진 각 사]

PC는 모든 표현에서 인종·민족·성·언어·종교 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다. 예컨대 흑인이나 황인을 백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보는 언행을 해선 안 된다는 관점이 PC에 해당한다. 이는 다양성의 공존을 중시하는 대표적 국가인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호응을 얻어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해소로 각국에서 시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스마트폰 대중화로 국경 없는 온라인 소통이 대폭 늘어난 2010년대 들어 ‘PC 열풍’도 그만큼 거세졌다. 유행에 민감한 콘텐트 업계가 지난 수년간 앞 다퉈 드라마·영화·게임·만화 등의 PC 추구에 나섰던 배경이다.

넷플릭스는 그중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힌다. 작품에 무조건 흑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이른바 ‘블랙 워싱’과, 배역에 성소수자를 할당하는 등의 전략으로 호응을 얻어왔다. 그런데 이에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소비자도 그사이 급증했다. 3월 시즌2가 공개된 드라마 ‘브리저튼’은 1800년대 영국 런던의 상류사회가 배경인데 남성 주인공이 흑인 귀족인 설정이다. 백인 사회에서 흑인은 하위 계층이라는 편견을 타파한다는 취지이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선 “시대적으로 흑인 귀족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역사 왜곡 아니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PC 논란에 휩싸인 글로벌 기업은 넷플릭스만이 아니다. 디즈니플러스로 OTT 시장에서 넷플릭스에 도전장을 던진 월트디즈니는 회계연도 2분기(1~3월) 매출이 202억7000만 달러로 직전 분기 대비 7.1% 감소했다.

블리자드 게임 ‘오버워치’의 성소수자 캐릭터. [사진 각 사]

블리자드 게임 ‘오버워치’의 성소수자 캐릭터. [사진 각 사]

디즈니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부문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32.3%나 줄었다. 미 뉴욕 증시의 디즈니 주가는 지난해 9월 고점에서 반 토막이 난 상태다. 글로벌 증시 하락세와 비교해도 하락폭이 두드러졌다. 외신들은 이 모든 게 디즈니의 PC 추구 때문만은 아니지만, 관련 행보가 거센 논란을 일으키면서 소비자를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2월 해외에서, 이달 국내에서 첫 방영된 디즈니플러스 ‘더 프라우드 패밀리: 라우더 앤 프라우더’는 가족용 애니메이션임에도 동성의 부모 캐릭터를 등장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디즈니는 내년 개봉하는 ‘인어공주’ 실사 영화에도 흑인 배우를 인어공주 역에 캐스팅해 원작 파괴라는 논란을 낳았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디즈니의 한 임원은 이에 대해 “PC 코드를 통해 작품에 접근하는 게 창의성을 제한할 수 있다”며 회사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음을 밝혔다. 디즈니의 PC 중시 방침은 오프라인 테마파크 사업에서도 논란거리다. 디즈니월드가 있는 미 플로리다주에서 의회가 유치원과 초등학교 아이들에 대한 성적 취향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내자, 디즈니의 밥 차펙 최고경영자(CEO)가 “법안에 반대하며 정치 자금도 기부하지 않겠다”고 밝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에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주지사는 “디즈니월드에 지난 수십 년간 내줬던 토지 자치권의 박탈을 검토하겠다”고 지난달 으름장을 놨다.

그러자 관광업 타격을 우려한 지역 주민들까지 디즈니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며 성토에 나섰다. NYT는 “모두를 위한 가치를 추구해온 디즈니가 민감한 현실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며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려다가 모두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른 콘텐트 공룡 워너미디어도 PC에 대한 역풍을 마주하고 있다. 워너미디어 산하 DC코믹스는 스테디셀러 ‘수퍼맨’의 최신 주인공이 작중 양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하도록 그리다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히어로(영웅) 캐릭터에 대한 묘사를 과하게 해야 하느냐”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 보호 위해 필요” 주장도  

왓챠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사진 각 사]

왓챠 ‘시맨틱 에러’의 한 장면. [사진 각 사]

이는 최근 해외 진출에 한창인 동시에 일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국내 콘텐트 업계도 신중히 참고할 문제라는 분석이다. 국내 OTT 왓챠는 2월부터 방영한 드라마 ‘시맨틱 에러’에서 남성 간의 로맨스(BL) 코드를 전면 삽입해 호평과 물음표를 동시에 받았다. 웹툰·웹소설로 해외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는 네이버와 카카오도 일부 작품이 PC 코드를 내포, 심한 경우 역풍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 적정선의 해법을 찾지 못할 경우 해외 진출에 적신호가 켜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와 전문가들은 PC의 열풍이 역풍으로 바뀐 근본적 이유부터 기업들이 짚어 힌트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학원생 안모(33)씨는 “예컨대 미드(미국 드라마)에서 황인은 머릿수만 채우는 비중 낮은 조연으로 나오고 흑인 캐릭터의 비중과 지위만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나 같은 소비자들은 이런 ‘선택적 PC’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장인 이모(35)씨는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세계적 인기를 모은 이유도 PC 요소가 없는 신선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PC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PC 코드 작품이 등장해 소비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중들은 지도층의 위선이나 자기 관점만 옳다는 식의 선민의식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피로감이 PC 코드의 문화 콘텐트 수용에도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유럽에서는 PC에 입각해 난민을 대거 수용했다가 토박이들이 삶의 질 저하를 맞는 상황이 발생, PC를 일종의 역차별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된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한 박사는 “가족용 드라마·영화라고 홍보했는데 너무 빈번히 PC 요소가 등장하면 소비자가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며 “가족용으로는 이견의 소지가 있는 콘텐트를 따로 분류해서 소개하는 등, 업계가 여론을 수렴해 적정선의 공급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과잉 논란이란 목소리도 있다. 한 문화평론가는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 보호에 문화 콘텐트가 큰 기여를 한다”며 “PC 지향이 사회 통합의 원동력이라는 대중적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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