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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와 K팝 이전, 미8군부터 홍대앞까지...한국 팝 40년[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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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고고학
전4권
신현준·최지선·김학선 지음

을유문화사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여기서 1985년 봄, 하나의 운명적인 조우가 이루어진다. 전인권과 최성원이 들국화의 음반을 계약하기 위해 벽제의 지구레코드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 근처에 있던 박지영레코드에 잠시 들러 이곳의 사장인 김영과 조우한 것이다. 음반 소매점을 운영하면서 몇 종의 음반 제작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김영이 들국화를 통해 '동아기획 신화'를 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들국화에 관한 이런 얘기는 네 권짜리 『한국 팝의 고고학』 중 1980년대를 다룬 셋째 권에 나온다. 들국화가 첫 음반 이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 멤버들이 어떻게 모였는지는 물론이고 서울 삼청동 전인권 집에서 출발한 일행이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려다가 새로 나온 음반들을 구경할 겸 들어간 가게에서 이들을 알아본 김영 사장과 의기투합하는 과정까지, 놀랄 만큼 상세하다. 대중음악을 다룬 책에 뜻밖에도 '고고학'이라는 제목을 넣은 이유가 수긍이 간다.

들국화. 2016년 모습이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들국화. 2016년 모습이다.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 발굴 장비는 당시의 언론보도·음반 등을 포함한 방대한 자료, 그리고 인터뷰다. 특히 인터뷰는 신중현·이장희·조용필·김창완·배철수·조동진·나미·들국화·한영애·엄인호·신해철·김완선·장필순·주현미·유희열·이적 등 낯익은 스타와 손석우 같은 스타 작곡가, 대중에게 덜 알려진 연주자 등을 아울러 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는지, 초기 활동은 어땠는지 등을 묻는다. 각각의 시대를 복원하는 중요 자료이자 책의 본문으로도 실려 있다. 인터뷰 대상의 숫자와 면면도 그렇지만 현재 고인이 된 이들까지 포함된 점에서도 다시 하기 쉽지 않은 귀한 시도다.

각 권이 약 500~750여쪽에 달하는 이 네 권의 두툼한 책은 대중음악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왜 이제야 나왔나 싶을 정도로 반갑고 흥미진진하다. 사실 '이제야' 나온 건 각각 80·90년대를 다룬 두 권. 앞서 60·70년대를 다룬 두 권은 2005년 같은 제목으로 처음 나왔으니 17연만의 완간이다. 절판됐던 앞의 두 권도 인터뷰를 추가로 수록하는 등 개정·증보판이다.

신중현. 2019년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중현. 2019년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음악평론가인 저자들 중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의 서문에 따르면, 2005년의 제목 후보 중 하나는 '한국 록의 고고학'. 여기서 짐작하듯 이 책은 일제강점기나 트로트까지 아우르는 통사나 음악사의 교과서를 지향하고 쓰인 것은 아니다. 한데 미8군 무대 등 서구의 영향으로 시작된 음악의 궤적을 좇는 이 책의 작업은 후반으로 갈수록, 특히 80·90년대는 트로트·댄스·발라드에 아이돌이나 홍대앞 인디 등 사실상 대중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성격이 강해진다.

물리적 공간이 부각되는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다. 미8군 클럽부터 음악감상실, 생음악살롱, 고고클럽, 나이트클럽 등 주요 라이브 무대의 변화는 음반·방송보다 공연이 훨씬 중요했던 초기 음악활동의 양상, 캄보밴드·그룹사운드 등 구성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특히 80년대 이후는 방송사가 밀집했던 여의도를 비롯해 신촌, 대학로, 이태원, 강남 등 음악 활동의 지리적 공간까지 좀 더 본격적으로 부각한다. 조동진의 아파트처럼 음악인들의 사랑방이 된 공간만 아니라 주요 음반사·기획사의 사무실·녹음실의 주소지까지 짚어가며 지리적 중심축의 변화를 주장하는 등 저자들의 집요함에는 종종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공간의 상징성에 대한 해석도 곁들여진다. 80년대 주현미 등의 트로트에 나오는 영동(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 지금의 강남 지역)이나 90년대 오렌지족의 중심지로 여겨진 압구정동 등이 대표적이다.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 참가자들 기념사진. 배철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을유문화사]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 참가자들 기념사진. 배철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을유문화사]

그럼에도 해석보다도 그 바탕의 방대하고 사실적인 디테일에서 이 책의 힘이 두드러진다. 어떤 장을 펼쳐도 저자들이 주목한 당대의 뛰어난 가수나 음악인에 대한 얘기가 기대 이상으로 자세히 나온다. 각 음악인에 할애된 분량에서는 이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저자들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눈으로 보면 이수만, 방시혁 같은 K팝의 거물들의 과거 활동 얘기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부분. SM·하이브 같은 지금의 대형기획사들에 앞서 과거 '킹박'(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을 비롯해 흥행사나 음반사·기획사들의 활동도 시대별로 나온다. 스타연대기를 넘어 산업적 역사로서도 대중음악사를 조명하는 지점이다.

 조용필(오른쪽). 2015년 데뷔 50주년 간담회 때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용필(오른쪽). 2015년 데뷔 50주년 간담회 때 모습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부정적 의미에서 놀라운 것도 있다. 여성 음악인 인터뷰가 현저히 적다는 점이다. 60년대만 해도 김추자와 펄시스터즈를 비롯한 디바들이 활약한 시대인데 첫 권에 수록된 인터뷰는 아예 남성 일색이다. 인터뷰를 거절당했거나 저자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대중음악사의 실제에 비추면, 더구나 이 책의 밀도에 비추면 심각한 불균형이다.

제목의 '한국 팝'은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과 문자 그대로 대중적인(popular) 음악을 함축한다. 예전 같으면 설명이 좀 더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방탄소년단 등 'K팝'이 세계적 위력을 떨치는 시대다. 한국 대중음악을, 이에 대한 외래의 영향을 굳이 자조적으로 볼 필요가 더는 없는 시기에 이 책이 완결됐다는 게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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