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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억 지워드립니다…심야식당 단골인 아이에게 벌어진 일

중앙일보

입력 2022.05.27 06:00

잊고 싶은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인데요, 바로 여기서 시작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분희 작가의『한밤중 달빛 식당』입니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집을 나온 연우는 정처 없이 걷다 좁은 골목길 끄트머리에서 식당 하나를 발견합니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죠. 하지만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연우에게 돈이 있을 리 없습니다. 식당을 지키던 여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나쁜 기억’ 한 개면 됩니다.

이미 연우의 눈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에 꽂혔습니다. 촉촉하고, 폭신하고, 달콤한 케이크를 보니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오늘 낮 동호의 책상 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를 보고 주머니에 넣은 기억을 주기로 하죠. 아이들도 거의 없는 하교 시간이었지만, 가슴은 방망이질 쳤거든요. 안 그래도 꺼림칙 했는데, 잘 됐습니다. 나쁜 기억도 지우고 맛있는 케이크도 먹는다니,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거래잖아요.

한밤 중에만 열리는 달빛 식당의 주인 여우가 연우에게 "나쁜 기억을 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알쏭달쏭한 여우의 표정 때문에 더 헛갈린다.

한밤 중에만 열리는 달빛 식당의 주인 여우가 연우에게 "나쁜 기억을 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알쏭달쏭한 여우의 표정 때문에 더 헛갈린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가방을 열었더니 반짝이는 새 실내화가 나옵니다. 어제까지 신던 구멍 난 낡은 실내화는 온데간데없고요. 동호가 “나는 돈을 잃어버렸는데 너는 새 실내화가 생겼네?” 하며 시비를 걸었지만 무시했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갈 곳이 마땅찮은 연우는 어제 그 골목 언덕에 다시 갑니다. 식당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날 밤늦도록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 연우는 다시 골목을 찾습니다. 식당은 늘 거기 있었다는 듯 그 자리에 있었죠. 오늘은 나쁜 기억 2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차고 넘치는 게 나쁜 기억이니까요. 오늘은 푸딩이네요.

『한밤중 달빛 식당』은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과 맞바꾼, 그래서 영영 잊어버린 나쁜 기억을 둘러싼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연우의 가방에서 나온 새 실내화와 온갖 학용품이 동호의 돈 5만원을 주고 산 거라는 게 결국 밝혀지죠. 그 사실에 연우조차 놀랍니다. 연우는 그 기억을 까맣게 잊었으니까요. 더 큰 갈등은 연우가 정말 잊고 싶어 한 기억 때문에 생겨나죠. 푸딩과 맞바꾼 바로 그 기억 말입니다. 그 기억을 잊어버린 탓에 연우는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릅니다.

연우에겐 동호의 5만원을 몰래 주운 것보다 더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 있다. 아빠가 서툴게 만든 계란말이 덕분에 푸딩과 바꾼 그 기억을 되찾게 된다.

연우에겐 동호의 5만원을 몰래 주운 것보다 더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 있다. 아빠가 서툴게 만든 계란말이 덕분에 푸딩과 바꾼 그 기억을 되찾게 된다.

기억이 있다는 건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잊고 싶을만큼 나쁜 기억을 남겼다면, 그만큼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죠. 나쁜 일은 이미 일어났는데 기억을 지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이 책은 독자에게 바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게다 좋은 일이 나쁜 일을 가져오기도 하고, 나쁜 일이 좋은 일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북방에 살던 노인 새옹은 좋은 일이라고 반드시 좋기만 한 건 아니고, 나쁜 일이라고 반드시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말하죠. 새옹지마 얘깁니다. 집을 나간 새옹의 말이 얼마 뒤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왔고, 그 말 때문에 아들이 다쳤는데 그 덕에 아들은 전쟁터에 끌려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 모두 아시죠? 연우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연우가 지우려 한 그 사건 덕에 밤늦도록 집에 오지 않고, 와서도 술만 마시던 아빠가 정신을 차리죠. 무엇보다 그 일은 막상 마주하면 해결 못 할 일도 아니었고요.

『한밤중 달빛 식당』은 일본의 만화 『심야식당』을 떠오르게 합니다. 밤에만 문을 여는 독특한 식당이라는 점에서 닮았죠. 김지은 아동문학 평론가는 “시대를 반영한 감각적인 동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시각과 후각, 촉각을 자극하는 음식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먹방이 각광 받는 시대잖아요. 동화도 시대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겠죠. 그래서인지 이 책은 국내에서만 20만부 이상이 팔렸고, 중국과 대만에서도 출간됐습니다.

달빛 식당은 일본 만화 『심약 식당』을 떠올리게 한다. 한밤 중에만 열린다는 점에서 두 식당은 닮았다.

달빛 식당은 일본 만화 『심약 식당』을 떠올리게 한다. 한밤 중에만 열린다는 점에서 두 식당은 닮았다.

이 책은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동화인데요, 2학년인 저희집 어린이는 좀 어려워했어요. 잊혀진 기억을 매개로 연우에 대한 정보를 감춘 채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죠. 읽기에 능숙한 어린이 독자라면 이야기의 빈 조각을 뒤에서 찾았을 때 오히려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이보다 제가 더 재밌게 읽은 이유죠. 우리 아이의 읽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리트머스 같은 동화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 책을 읽고 즐거워한다면 좀 더 글밥 많은 책으로 넘어가는 게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 한 줄 평  “어머, 연우한테 이런 사연이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읽기 능력을 갖춘 어린이라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 함께 읽으면 좋을 이분희 작가의 다른 책
『사라진 물건의 비밀』내가 물건을 잃어버린 게 물건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한밤중 달빛식당』처럼 퍼즐을 맞춰 가는 즐거움이 있는 책
『신통방통 홈쇼핑』 도깨비가 쇼호스트인 홈쇼핑에서 물건을 주문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분희 작가의 본격 장편 동화.

· 추천 연령  그림책에서 동화책으로 넘어가는 읽기 단계의 어린이,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를 타깃으로 나온 책입니다. 하지만 저학년 어린이에겐 좀 어려울 수 있어요. 아이와 함께 숨겨진 단서를 찾아보는 식으로 읽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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