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과거는 유교국가 떠받치는 인재풀, 조선판 능력주의

중앙일보

입력 2022.05.2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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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서양엔 없는 과거제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퇴계가 공부는 수양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과거 공부에 힘쓰라고 했거든. 퇴계도 자식 출세라는 부모 욕심을 벗어나진 못한 거지.” 어떤 동료가 한 말이다. 실제로 퇴계는 조카 영(寗)과 손자 안도(安道)가 합격하자 “안동에서 보내온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고 너희들이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요행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고 했다. 동료의 말처럼 퇴계 역시 요즘 부모들이 자식이 고시에 합격하길 바라듯이 자기 자식의 출세를 바라고 과거 합격을 기뻐한 것일까.

과거 합격해야 관직 나갈 수 있어
양반 출신도 정치적 독점 못 누려

개인 영달보다 신분 유지 성격 커
파직돼도 언제든 관직 회복 가능

녹봉은 서울살이 겨우 버틸 정도
집안 살림은 농사 지으며 꾸려가

퇴계가 손자 급제 소식에 기뻐한 까닭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 효도(貢院春曉圖·부분)’. 봄날 새벽에 열린 과거시험장 풍경이다. [사진 서울옥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 효도(貢院春曉圖·부분)’. 봄날 새벽에 열린 과거시험장 풍경이다. [사진 서울옥션]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지금과 다른 세상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다르다는 것, 즉 변했다는 것이 역사성이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사회도 앞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성을 모른다는 것은 현재의 역사성 역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성을 인식하고 역사를 공부할 때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하지 않고, 현재의 질곡 때문에 지레 미래에 대해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성은 다음 세 가지 범주로 생각해볼 수 있다.

①현상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시대에 따라 다른 사실(史實):조선의 농사와 한국의 농사, 상평통보와 한국은행권, 동아시아의 사(史)와 미국의 역사학 등. ②현상적으로 다른데 비슷한 기능을 하는 사실:왕과 대통령, 왕정과 가족제도, 편지와 카톡 등. ③시대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사실:농노, 노동자, 귀양, 경운기, 전기(電氣) 등.

퇴계 이황

퇴계 이황

그렇다면 조선시대 과거와 한국의 고시는 어디에 속할까. ①현상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시대에 따라 다른 사실에 해당한다.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데 상당히 다른 성격의 역사 산물이다. 과거제도에 대한 연구는 그 주제가 광범위한 만큼 일단 두 가지 측면에서만 언급해두고자 한다. 하나는 과거급제가 역(役), 즉 국가(왕)에 대한 의무라는 점이다. 그 나라에 살면 누구나 역을 부담하게 돼 있다. 또 하나는, 특히 문과의 경우, 그것이 관료-기술적 전문성보다 정치가의 보편성에 초점을 둔 제도였다는 점이다.

과거제는 시험을 통해서 관직에 나가는 능력주의 제도의 하나다. 17세기 이후 절대왕정을 거쳐 국민국가로 들어서며 관료제를 두기 시작했던 유럽 여러 나라는 그 모델을 중국에서 가져왔다. 유럽인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여 ‘공무원을 시험으로 뽑는’ 과거제를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봉건 귀족 중심의 왕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분명 가신(家臣) 정치는 능력주의와 경쟁에서 밀리게 돼 있었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불안정할 수 있다. 이제 귀족, 양반 집안 출신이라도 정치적 독점권을 갖지 못한다. 만일 인력풀이 더 넓어지고 이들 집단이 주변화하면 정치적 소외감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에는 이런 요소가 개재돼 있었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문장·문서 작성 능력과 직접 연결됐다. 글을 쓰는 기술이 세습적인 사회적 지위를 대체한 것이다. 조정에서 국왕은 덩그러니 홀로 과거제를 통과한 신하들 사이에 앉아 그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했다. 경연(經筵)이 그것이었다. 배우는 건 나이가 먹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국왕이든 일반 백성이든 교육과 학습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키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를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명분이든 실제이든 말이다.

문장 실력과 경세제민의 비전

퇴계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15세 손자에게 학문에 힘쓰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사진 들녘]

퇴계 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15세 손자에게 학문에 힘쓰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사진 들녘]

조선의 과거제에는 문과와 무과, 잡과가 있었다. 문과의 경우, 능력을 판단하는 핵심은 첫째가 문장이고, 둘째가 경세제민의 비전이었다. 무과는 무술과 전략을, 잡과는 법률·외국어·행정·음양·지리 등의 전문성을 갖추어야 했다. 급제하면 출세(出世)했다고 했는데, 이는 공부를 마치고 그걸 활용하러 관직에 나간다는 말이었다. 요즘처럼 권력이 따르는 세속적 위신이 높아졌다는 뜻의 ‘출세’와 다르다. 같은 용어지만 역사적 맥락에 따라 이처럼 의미가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를 거쳐 관직에 임명된 관원=공무원을 관직에서 그만두게 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임명장까지 빼앗는 삭직(削職), 임명장은 두고 관직만 파면하는 파직(罷職), 죄는 없지만 자의나 타의로 그만두는 체차(遞差) 등이 있었다. 요즘의 파면·해직은 주로 연금과 관련된 경제적 박탈의 의미를 가지며, 파면의 경우 공직자의 자격이 완전히 상실된다. 이와 달리 조선의 관료는 삭직이든 파직을 당하였더라도 언제든지 관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전히 공무원 인재풀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파직은 요즘처럼 상승(보장)됐던 신분이 하락(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은 유지되고 직책만 없어지는 것이었다. 또 파직됐어도 관작(官爵), 즉 통정대부·자의대부 등의 품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더 무거운 죄를 지어 관작까지 삭탈하는 경우와 성문 밖으로 내쫓거나 귀양을 보내기도 하는 식으로 처벌 수위가 높아지더라고 양반이라는 신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관작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빈번한 관직 체차나 파직의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사료를 읽다 보면 유난히 관료들의 사직서 제출이 잦은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직서 제출을 의례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관직이 생계유지와 위신 관리에 그만큼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지방에 집이 있는 사람은 세를 얻어 서울살이를 해야 했다. 녹봉이라야 노부모·처자식·노비 등을 건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집안 살림은 원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농사를 지어 유지했다. 녹봉은 자신의 서울살이를 유지하기에도 버거웠다.

앞서 모든 계층의 민(民)은 국가(왕)에 대한 역을 진다고 했다. 국가에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 의무인 역을 부담하지 않는 노비는 주인에게 신역을 낸다. 평민은 군 복무를 하는 군역으로, 중인은 서리나 아전이 돼 직역을 수행한다. 또 일부 중인은 과거제의 하나인 잡과를 통해 전문성을 살린 직역을 수행했다. 관직이라는 포장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양반은 관직을 맡는 것이 바로 직역의 이행이었다.

양반이 과거 급제에 매달린 이유

여기가 핵심이다. 양반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래야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분의 ‘상승’이 아니라!) 17세기 들어 직역을 수행하지 않고(엄밀히 말하면 과거에 붙지 못해 직역을 수행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서원만 출입하는 유생(儒生)들에게는 호포(戶布)를 부과하자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양반인데 직역을 수행하지 못하고 시험공부는 해야 하니, 바로 군역을 지는 대신 포(布)라도 내게 하자는 의견이 시남(市南) 유계(俞棨) 등에 의해 제기됐고, 결국 영조 때 균역법으로 이어졌다.

퇴계는 “너를 따라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네가 무사히 접(接)에 참여했다고 전해주니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접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의 모임이다. 경상도 영주시에 있는 고시원이었다. 여기에는 퇴계도 간 적이 있었고, 장남 준(峻)도 참여했다. 직역을 마치기 위해서는 우선 시험에 붙어야 했다. 그러니까 자손의 과거급제에 대한 퇴계의 걱정은 요즘 우리가 흔히 성인이 된 청년에게 “군대 가야 할 텐데…”라고 하는 말과 같고, 자식 과거 급제의 기쁨은 무사히 제대한 아들을 맞이하는 부모의 기쁨과 같은 종류가 아니었을지. 물론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에서의 지원이나 제대에 더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손자가 급제한 뒤 퇴계는 편지를 보냈다. “네가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안심은 된다만, 후생들이 아주 작은 이름이라도 얻게 되면 스스로 일생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하고 제정신을 놓은 채 취한 듯이 행동하니, 너무도 딱하고 가소롭다. 거듭 경계하거라.”

중국보다 더 또렷한 ‘학자-관료’ 모델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규모의 차이 때문인지 중국보다 조선이 학자-관료 모델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종친·외척을 비롯한 왕실, 사적인 네트워크 가능성이 높은 내관이나 후궁, 국가에 대한 기여도 때문에 자의성이 발휘되기 쉬운 공신과 그 자손들의 정치 참여보다 과거제로 선발한 ‘학인=선비’의 몫이 훨씬 컸다.

‘그 사람 자체가 대학’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라이프니츠는 “유럽이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중화 제국이 유럽에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아편전쟁을 겪기 전까지, 그러니까 중국이 종이호랑이라는 걸 유럽에서 눈치채기 전인 17세기 중국은 유럽인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모델이었다. 그 중심에 과거제도가 있었다.

조선이나 중국이 ‘근대성’의 어떤 요소를 선취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어떤 문명이든 대개 19세기를 지나며 국가 기구의 기술적 복잡성이 전통적인 사회 규모를 능가했을 때는 온갖 고민이 밀려왔을 것이다. 이 주제는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사진)가 『잃어버린 근대성(Lost Modernities)』에서 동아시아의 경험을 기초로 통찰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단 4장 중 한국 관료제에 대한 관찰은 빼고.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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